나는 너다

조회 수 3525 추천 수 0 2011.02.17 03:43:44

어제 빈가게에서 새벽까지 놀다 가신.. ㅋㅋ 고병권씨의 훌륭한 글...

나/너와 같이 읽어싶어 전합니다.

 

나는 너다 -당신께 전하는 우리 존재의 슬로건

- 고병권(수유너머R)

 

 

스피노자의 <<에티카>>에는 ‘정서적 모방(affectuum imitatio)’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아기가 울면 옆에 있던 아기도 괜히 따라 우는 걸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웃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단지 누군가 눈물을 흘리는 것만을 보았을 뿐인데 그런 감정이 일어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어떤 신체가 우리와 유사하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그 신체와 유사한 정서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쁨을 느끼고, 슬퍼할 때 함께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슬픔에서 벗어나려 하듯 다른 존재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반대로 접근합니다. 인류라는 미리 가정된 공통성에서 정서적 모방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정서적 모방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집합적인 존재로서 인류를 떠올리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런 정서적 모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도 아닌 셈입니다.^^ (물론 통상적 인류의 범주를 넘어서까지 정서적 모방이 가능하다면 그는 인간을 넘어서기도 하겠죠.)

 

이런 정서적 모방은 사회계약 이전의 문제입니다. 이익을 셈하고 합리성을 논하기 이전에, 그리고 이기주의냐 이타주의냐를 논하기 이전에, 말 그대로 인간의 존재 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하부구조라고 할까요.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사는 이유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도 자기와 타인의 구별을 넘어선다고 말합니다. 최고로 좋은 것에 대한 깨달음은 그것이 모든 이에게 공통되고 모든 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임을 또한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독점할 수도 없고 누군가 그것을 누린다고 시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을 위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 자기를 배려하는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의 구별이 다시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모두가 깨달음을 함께 누렸으면 하는 마음, 그것을 스피노자는 ‘피에타스(pietas)’, 즉 도의심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성적 안타까움이라고 할까요. 저는 스피노자의 말을 들을 때마다 ‘피에타’ 상의 성모가 지닌 표정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부처의 ‘자비’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정서적 모방에서 도의심까지, 스피노자를 읽으며 저는 우리 존재의 슬로건이 바로 이 한 가지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너다!’ 정념의 저 깊은 곳에서도, 이성의 저 높은 곳에서도, 우리는 존재를 규정짓는 ‘연대’의 그 한마디를 발견합니다. 증오의 반대말로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깊고 더 높은 곳에서, 아무런 반대자를 발견하지 않는, 단지 반대자조차 없는 그런 고립에만 반대하는, 아주 원초적인 ‘사랑’을 거기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한 모욕을 지금 이곳에서 발견합니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엄기호님이 신자유주의 한국을 요약하며 자신의 책(낮은산, 2009) 제목으로 삼은 말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공포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사회, 오로지 자기 스펙으로 상황을 돌파하라고, 오로지 제 몸뚱이 하나를 조각해서 팔아먹으라고 강요하는 사회, 연대를 그 무엇보다 불온시하는 사회에 대한 참으로 적절한 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화원들이 열악한 처우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 간단히 계약을 해지해버리고, 그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 단지 용역회사와 관계할 뿐이라고 말하는 홍익대학교 말입니다. 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이념을 가진 최고 교육 기관에서, 저는 인간 존재와 교육에 대한 최고 모욕을 함께 봅니다. ‘나는 너다’와 ‘계약해지’가 참 묘한 대비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고상하고 또 고상한 홍익대학교 관계자들에게 이번호 위클리에 게재된 김민수님의 글을 꼭 읽히고 싶습니다. 글 마지막에 나오는 “씨발”이라는 욕설을 보고는 전 눈물이 핑 돌았답니다. 당신들이 거기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거기서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들이 그걸 느낄 수 없다면 그냥 욕설 그대로 들어도 좋겠습니다. 어떻든 꼭 읽어주시길!


김민수님 글은 http://suyunomo.net/?p=6744

 


우마

2011.02.17 04:09:23

글 좋다. 근데 정서적 모방.. 나... 인간 아닌건가? ㅠ

복² 냥

2011.02.17 04:42:48

'자기 삶에 대한 공포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사회....'

이십대 중반이후부터 뼈저리게 느껴온,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우울한 이유네요...

빈집을 알고나서, 전에는 해본적도 없거나 스쳐갔던 주제들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되네요.

낭낭

2011.04.21 09:53:06

'사랑', '연대', 아름다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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