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합니다

빈마을 조회 수 5119 추천 수 0 2014.02.21 18:00:00

이달 말부터 함께 기거하기로 한 부드러운 남자 빡빡이 입니다.ㅎㅎㅎ

 

신고를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연히 10여년 전 쓴 글을 누가 보내주어 신고의 변을 대신합니다.

 

두손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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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한다 - 박승옥 -

공동선을 열며-53(11/12월호). 2003. 10.

 

아침마다 아름드리 나무로 우거진 장충단 공원으로 들어가 산책을 시작합니다.

동국대 정문 옆의 계단을 숨 고르며 한참 오르다보면 남산 산책길이 나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걷고 뛰고 드문드문 서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뒤로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 모자를 푹 눌러 쓴 사람, 모자를 거꾸로 쓴 사람, 수건을 머리에 두른 사람, 수건을 목에 걸친 사람, 헤드폰을 낀 사람, 손전화를 든 사람, 물통을 든 사람, 라디오를 든 사람, 가방을 멘 사람, 체육복 입은 사람, 신사복 입은 사람, 수녀복 입은 사, 중 옷 입은 사람 등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남산의 아침 공기를 마십니다.

 

물론 강원도 산 속 깊은 오솔길의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매연으로 찌든 서울 한복판에

한동안 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키 큰 나무가 길가에 서서 터널처럼 길을 덮고, 약간은 덜 숨막히는 공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합니다.

 

남산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나무와 풀과 돌과 흙과 벌레, , 짐승들을 만납니다.

단풍나무, 벚나무, 소나무, 참나무, 미류나무, 아카시아 나무, 동나무, 산죽, 나팔꽃, 거미, 까치, 다람쥐 등등 온갖 것들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흙을 보면서, (!)냄새도 원 없이 맡으면서(물론 밟지는 못합니다) 걷습니다.

심지어 남산 1호 터널 관리사무소가 있는 곳 산기슭에는 이쁜 호박꽃도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 똑같은 생김새의 나무, 똑같은 모양의 풀, 똑같은 까치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 다 다릅니다.

한 나무에 있는 그 무수한 나뭇잎조차 똑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 나뭇잎 하나의 세포를 뜯어보아도 똑같은 모양의 세포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생명체건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게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다름이 모여 나뭇잎이 되고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고 남산의 단풍나무가 되고 종으로서의 단풍나무가 되고 지구라는 닫힌 계 안의 생명체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과 인위를 대립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게 그냥 그대로 가만히 저기 있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연을 제 멋대로 만지고 새로운 그 무엇으로 가공하고 파괴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영원히 변치 않는 상상 속의 오아시스가 아닙니다.

자연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죽고 죽이고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또 다시 태어나는 변화의 자연입니다.

 

그 안에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란 종이 지구에 붙어있는 암세포처럼 지구자원을 엄청나게 왕성한 식욕으로 먹어치우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지구가 더워지고 극지방의 빙하가 녹고 기후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이상기후가 아니라 지구가, 자연이 그렇게 변해가는 일종의 자기조절 현상입니다.

 

물론 한때 지상의 패권자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종개체수의 폭발과 전쟁,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멸종에 이른다 해도 여전히 자연은 호모 사피엔스 없이 그렇게 변하고 또 변할 것입니다.

 

자연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그리고 사람의 문화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한때 진리였다고 생각되던 이념도 어느덧 세월의 밀물썰물에 오락가락하다보면 허망한 물거품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임금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쳐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지금은 없을 것입니다. 바다 속 용왕신이 화가 나서 폭풍이 불고 이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심청이를 인당수에 바쳐야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지금은 없을 것입니다.

 

남산 산책로 바로 밑에 도시철도공사 연수원과 체육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있습니다.

옛날 중정(안기부) 자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멀쩡한 서울대 법대 교수가 고문 끝에 간첩이 되고 그리고 죽었습니다.

런 끔찍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 시대에 백지 유인물 사건이란 게 있었습니다.

대학교 안에서 두세 사람 이상의 모임도 허가를 얻어야 하고 반정부 유인물을 색출한다고 시도때도 없이 학생들 가방을 뒤집어보던 그런 때였습니다.

 

시위를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고 그나학우여소리를 내기도 전에 교내에 상주하고 있던 수많은 경찰들에 머리채를 잡혀 개처럼 끌려가야 했습니다.

 

419를 맞아 유인물은 엄두도 못 내고 그냥 있을 수는 없고 해서 연세대 학생 몇이 백지를 돌렸습니다.

1분도 되지 않아 경찰이 즉각 학생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경찰은 그 흰 백지에 무엇이 적혀 있나 해서 햇빛에 비쳐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보기도 하고 약물처리를 해보기도 했지만 뭐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학생들을 구속시켰습니.

죄목은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였습니다.

 

요사이 송두율 교수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다 분단이 빚은 비극입니다.

분단이 빚은 이상한 문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반공획일주의의 정신병 문화에 우리 모두가 감염되어 있었고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직도 그 증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상처 입은 까치가 산책로를 가로질러 종종거리고 지나갑니다.

 

포용과 관용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아침입니다.

 

박승옥 /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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