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까지 갈 것도 없이...

경제위기 속에서 작년에 한국의 은행들의 이윤이 10조가 넘는다는 군요.

 

아래 게시물에 올렸던 11월 5일 은행 계좌 전환의 날 Bank Transfer Day 제안은...

가십으로 다뤄진 후 영 소식이 없는데...

좀 진지하게 추진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뭐 좋은 생각 없을까나? ㅎㅎ

 

소개된 영화 <제 7의 봉인> 재밌을 듯. ㅎㅎ

언제 같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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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온 경제위기, “월가를 점령하라!”

-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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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르히만의 영화 <제7의 봉인>은 십자군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기사 블로크에게 찾아온 죽음의 신과 더불어 시작한다. 블로크는 체스로 죽음을 피하거나 연기하고자 하지만, 그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다시 찾아온 죽음의 신에게 끌려 손을 잡고 언덕 저편 너머로 춤을 추며 건너간다. 블로크가 죽음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전쟁과 페스트로 넘쳐흐르는 죽음 속에서, 소멸해가는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다시 얻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 게다. 그가 구원에의 믿음을 다시 얻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죽음의 신을 속이며까지 죽음을 연기함으로써, 그는 광대가족을 통해 살아있음의 기쁨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본다. 그들이 닥쳐온 죽음을 연기할 수 있도록 죽음의 신의 시선을 다시 속이는 것은, 거기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구원이란 죽음 저편에 있는 게 아니라, 죽음이 찾아오기 이전의 모든 순간에서 살아있음을, 삶의 기쁨을 느끼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죽음의 신이 다시 찾아왔고 결국 피할 수 없이 끌려갔지만, 죽음의 신을 속이며 죽음을 연기한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그는 다른 이의 삶의 기쁨을 연장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구하던 답을 얻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치 죽음의 신 같은 파국이 다시 찾아왔다. 2008년 가을, 북미의 거대한 대륙을 덮을 만한 커다란 망토를 쓰고 왔던 죽음의 신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리만 브러더스를 비롯한 수많은 거대 회사들이 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줄줄이 손을 잡고 그를 따라 언덕을 넘어갔다. 물론 오바마 정부를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들은 영화처럼 다가온 죽음을 면하기 위해 그와의 게임을 벌였고, 그것을 위해 수천조원에 달하는 돈을 쏟아부었다. 경쟁력 없는 것은 죽어 마땅하다던 시장주의의 논리에 반하여, 경쟁력 없어 죽어가던 금융회사들을 살리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여되었다. 블로크와 달리 그들은 이럼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가, ‘대공황’이라고 불리던 최악의 사태마저 그렇게 극복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사태가 예전같지 않은 듯하다. 올해 들어 그리스를 필두로 유럽연합을 덮친 죽음의 신이 2년전에 찾아왔던 바로 그 죽음의 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시 찾아온 죽음의 신! 베르히만의 영화에서 그것은, 적어도 주인공으로선 피할 수 없는 신이었다. 지금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선 어떨까? 영화만큼 흥미로운 테마일 것 같다. 2년이라는 상당히 긴 시간이 있었다. 수천조원의 거대한 돈이 투여되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죽음의 신을 푸닥거리해서 되돌려 보내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조순은 이렇게 진단한다. “2008년 금융위기가 시작됐을 때 각국에서 재정과 금융을 팽창시키며 돈을 풀었지만 이는 금융에 대한 응급처방이었고 실물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회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금융위기 이후 쏟아낸 돈은 실물 부문의 경제구조 개편과 같은 핵심적인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표면을 따라 흐른 뒤 다 떨어져 내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 거대한 돈으로 “깨진 독을 고치지 않고 물만 쏟아 부은 형국”이라는 것이다(2011.9.23.경항신문). 왜 이렇게 되었던 걸까? 이를 알려면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금융화가 갖는 위상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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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이후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시대는 한편에선 ‘유연성’을 위해 노동자들을 자르고 비정규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면, 다른 한편에선 이윤을 찾는 자본이 실물경제가 아니라 금융게임에서 이윤을 얻는 ‘금융화’를 특징으로 한다. 80년, 런던에선 외환에 대한 투기를 막는 조치들이 해제되면서 ‘돈’이 본격적인 투기 대상이 되었고, 미국에선 금융기관의 투기를 막던 조치들이 대거 해제되면서 금융상품이 다른 금융상품으로 증식되는 ‘파생상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본은 실물경제에 투자하기보다는 증권시장에서의 주가를 관리하여 차액을 남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돈이 몰려들수록 주가는 올라가고, 올라간 주가를 따라 돈이 몰려드는 체증적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실물적인 가치로부터 금융화된 가치의 괴리를, 즉 이른바 거품(bubble)을 거대한 속도로 급속히 증가시켰다. 1997년경 증권시장의 활황에 취한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경제’라고, ‘새로운 자본주의’라고 외쳤다. 그러나 3년뒤 뉴욕증시의 주가지수가 폭락하면서 그것은 단지 “새로운 거품”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거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휘저었지만, 결국 서브프라임 사태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꺼지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대대적’이란 말은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주택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면, 그 채권을 담보로 다시 채권을 발행하고, 새 채권을 담보로 다시 채권을 발행하는 식으로 무한히 증식되는 파생상품은, 가령 10억짜리 집 하나로 수십억의 채권으로, 이론적으로는 수백억 이상으로도 불어날 수 있다.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김종인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통화 거래량이 955조달러인데 그중 파생상품 거래가 601조달러, 증권시장에서 거래되는 채권이나 주식이 87조달러로 실물생산에 투입된 자금은 63조달러밖에 안된다.”(2011.9.23.경향신문) 파생상품의 거래량이 실물생산의 거래량의 10배에 이르는 것이다. 이건 이미 거품이 꺼지며 경제위기가 발생한 이후의 규모이기에, 그 이전이라면 이보다 훨씬 더 차이가 컸음을 상기해야 한다.

 

2008년 경제위기는 주택담보부 채권으로 시작된 이 파생상품의 계열이 부도에서 부도로 이어지는 사태로 시작된 것이다. 요컨대 경제위기의 핵심은 파생상품이나 기타 금융상품의 거품이 꺼지면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물과 완전히 괴리되어 이렇게 증식되며 경제를 돈 놓고 돈 먹기의 투기게임을 만드는 파생상품과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 없이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금융규제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금융자본가들인 이른바 ‘월가’의 반발로 실패한다. 실물경제의 10배 이상 되는 자금을 가진 금융자본가들이 자신들에 대한 강한 규제를 받아들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통제 없이 경제대책으로 공적 자금을 쏟아붓는 것은, 망했어야 할 그들 금융자본가들을 살려주기 위해 그들의 주머니에 전국민의 주머니를 턴 예산을 털어넣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덕분에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가장 먼저 회복된 것은 미국 월가의 주식시장”이었다. “위기극복 과정에서 들어간 돈이 실물로 들어가지 않고 모두 금융으로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김종인). 거대한 돈을 쏟아부었지만, 그것은 깨진 독을 때우는 데 들어간 게 아니라, 깨진 독에 물 붓듯 위기의 주범들 주머니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조순이나 김종인 모두 지금의 경제위기에 대책이 없고, 출구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렇다. 이미 실물경제의 10배 이상 규모로 불어난 파생상품을 규제하여 거품을 제거한다면, 설사 그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시행한다고 해도,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는 심각한 파국에 이르고 말 것이다. 1929년 대공황 이상의 심각한 파국을 각오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미 경제는 전지구화되어 있어서, 어느 한 국가의 정부가 좌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또 어느 국가든 파국적인 공황을 감수하며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자신만은 거기서 피해보려고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출구는 있어도, 누구도 그리 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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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월가를 점령하라!”고 외치며, 1%의 돈과 권력을 비판하며 시작된 뉴욕의 시위는 지금 자본주의와 경제위기의 이러한 본질을 정확하게 겨낭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위와 투쟁이 단지 뉴욕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금융자본가들을 향해 확대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 역시 현재 상황의 요체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월가’로 상징되는 전세계 금융자본가들이야말로 지금의 위기의 주범이면서,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로 막는 최대의 적이다. 또한 이 위기 상황에서도 은행과 금융회사들이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는 것은(한국의 은행들이 작년에 남긴 이윤은 10조2천5백만원이었다!), 이들이 위기 상황에서도 개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흡혈귀 같은 착취자임을 입증한다.

이제 경제위기를 빌미로 더 이상의 공적 자금이 금융자본들을 살리기 위해, 혹은 망한 기업을 살리기 위해 투여되게 방치해선 안된다. 흔히들 하청기업이나 거기 고용된 노동자들을 볼모로 삼아 망한 기업을 회생시키는데 거대한 규모의 돈을 쏟아붓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인용한 조순 말대로 또 다시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거꾸로 매일 시장과 경쟁력 타령을 하던 신자유주의자들의 얘기를 그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망해야 할 것은 망하게 두자고. 그리고 또 다시 거품을 불리는 것에서 출구를 찾으려는 금융자본가들의 입에 돈이 아니라 모래를, 쇠로 된 나사를 넣어주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 자신의 죽음을 연기하려는 추한 손을 다시 찾아온 저 죽음의 신이 꽉 움켜쥐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죽음, 그것은 모든 이의 죽음이 아니라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남는 사건일 수 있음을 되새겨야 한다. 금융기업에 쏟아부을 돈이 있다면, 그걸 직접 우리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말해야 한다.

‘월가를 점령한다’는 것, 그것은 그들 금융자본가들이 선 자리를 점령한다는 것이고, 그들이 만든 거품의 힘을 점령한다는 것이며, 그들이 행사하는 힘을 제압하고 점령한다는 것일 게다. 다시 찾아온 죽음의 신 앞에서, 돈과 자본에 점령된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삶을 위해 쓸 줄 아는, 삶의 기쁨을 위해 이용할 줄 아는 광대가족들처럼 현명하게 빠져나가 살아남아야 한다. 월가를 점령하는 것은 지금 이 위기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