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아침마다(금요일 빼고), 해방촌연구소에서 책읽기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이라는 수수께끼'를 읽고

이번주부터는 네그리와 하트의 '선언'을 읽고 있는데요.

같이 읽으면 좋겠다 싶은 부분이 있어 통째로 타이핑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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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9~

<빚을 전복하라>


주체화 과정은 거부에서 시작한다. 나는 하지 않겠다. 우리는 당신의 빚을 지불하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의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긴축 정책에 복종하지 않겠다. 대신에 우리는 당신의-아니, 사실상 우리의-부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다.


예를 들어 위기가, 개인들이 홀로 버텨야만 하는, 가장 강한 타격을 가하는 특정 시기에, 저항의 의지가 극단적이고 필사적인 힘을 가지고 솟구친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많은 철학자들은 의지의 기원을 결핍에 두고 있다. 마치 원하거나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의지는 결핍이 아니라 풍부함을 단언하려는 충동에서, 욕망을 발전시키려는 충동으로부터 생겨난다.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의지는 우리가 갖지 않은 것,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 우리가 욕망하는 것, 더 좋고 더 아름다운 것을 확언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성과 사회적 관계들의 충만함 말이다.


빚에 대한 거부는 따라서 공허한, 개별화된, 파편화된 지형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적 유대나 법적 관계들을 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속[유대]bond와 채무[은혜]debt라는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러한 구속bonds와 채무debts에서 탈주한다.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요한 사회적 연결로서의 화폐에 대해 말할 때 그는 현실주의적이었다. 맑스는, “개인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사회와의 유대만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을 갖고 다닌다.”라고 썼다. 채무에 대한 거부는 화폐의 권력과 화폐가 창출하는 구속bonds를 파괴하고 동시에 새로운 유대bonds들과 새로운 형태의 은혜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금융의 구속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에 의해 연결되면, 우리는 점차 서로에게 빚을 지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상호의존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주체적 형상들은 이미, 삶정치적 생산과 가치화에 의해 투여된 삶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새로운 경제적 상황에서 준비되고 발전되었으며, 특이성들의 협력 위에 세워졌다. 협력과 생산적 상호의존성은 공통적인 것의 조건들이고, 공통적인 것은 이제 사회적 생산의 주요한 기초를 구성한다. 우리를 서로 연결시키는 우리의 사회적 유대들은 하나의 생산수단이 된다. 우리의 상호의존성에서, 우리의 공통성commonality에서, 우리는 생산성과 힘[역량]을 발견한다.


금융 채무의 흐름들이, 개별화하는 효과들(괴로움, 좌절 그리고 고통 -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고립으로 인해 배가된다.)을 야기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형태의 빚이 계약 관계 안에 폐쇄되기보다 더욱더 사회적이고, 반反개인적이고, 이행移行적이고 특이한 것으로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체가 이러한 자각에 도달할 때, 특이성이, 자신이 종속되어 있는 궁핍과 역량박탈dispowerment의 나선들에서 빠져나갈 때, 주체는 이러한 사회적 유대와 사회적 은혜가 측정될 수 없다는 것, 아니 오히려, 전통적이고 양적인 용어들로는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사회적 유대와 사회적 은혜]은 단지 질적 용어들로만, 즉 욕망의 수단들로서만, 우리 자신을 오래된 비참함에서 끄집어내고 오랜 채무의 끈들을 끊는 결정들로서만 주어질 수 있다.


사회적 형식의 채무[은혜]는 공통적인 것이 갖는 고결한 측면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채무[은혜]는 채권자가 없는 채무이고, 특이성들 사이의 관계를 맺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게다가 그것은 도덕과 죄의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라기보다, 우리가 사회와 서로에게 지고 있는 사회적 빚[은혜]에 대한 상호적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윤리를 통해서 기능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의 수많은 투쟁들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빚의 멍에에 대항해서 벌어졌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는 구호는 가장 눈에 띄는 보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월스트리트는 전 지구적 채무 사회와 모든 채권자들에 대한 환유의 궁극적 상징으로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의들은 결코 홀로 설 수 없다. 우리는 주코티 공원의 야영장으로 흘러들고 있는, 최근의 채무 시위들의 두 개의 주요한 흐름들을 본다. 이 흐름들 중 하나의 흐름은 주로 종속된 국가들의 국가적 채무에 집중한다. 이 흐름은 경제 위기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들과 2001년 아르헨티나 민중 봉기에서 최고조에 도달한, 세계 은행과 IMF에 반대하는 다양한 대안세계화 시위들을 거쳐, 1989년 베네수엘라, 1977년 이집트 그리고 1976년 페루에서 발생한,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십여 차례의 “IMF 폭동들"로 소급된다. 또 다른 흐름은 더욱 균열된 것이다. 이 흐름은 가난한 자들에게 개인적이고 개별화하는 채무의 부담을 지우는 것에 대한 항의라는 특징을 갖는다. 가령 1992년 LA, 2005년 파리, 2011년 런던의 폭동들에서처럼 말이다. 이 세 번의 폭동들은 모두 대도시에서 인종적 종속에 반대하는 분노의 표현들이었고, 경찰의 폭력적 행동들에 의해 발발했다. 하지만 인종적 특징은 각각의 경우에 상품과 부의 힘에 대한 거부와 강하게 맞물렸다. 부분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던 상품들에 대한 욕망이 약탈과 방화를 부채질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그러한 상품들이 사회적 예속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방식들에 대한 상징적 파괴이기도 했다.


우리는, 몇몇 사람들이 주코티 공원의 질서 정연한 점거자들을, 나아가 축제적인 대안 세계화 시위 참여자들을,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의 야만적 자크리들[폭동들]jacqueries 및 분노의 폭력적 표현들과 함께 묶는 것에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투쟁들 중 어던 것은 더 선진적인 것이고, 다른 것들은 후진적인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아니다. 자발성에서 조직화로 나아가는 정치적 의식의 이행에 대한 낡은 볼셰비키적 이론은 여기에 더 이상 끼일 자리가 없다. 가난한 자의 반란은 더 조직되고 더 건설적이어야 하며, 덜 폭력적이어야 한다는 설교는 더 이상 하지 않도록 하자. 미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함에 반해, 대도시 어두운 지역들에서는 실탄을 사용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투쟁들 각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력한 거부가 새로운 사회적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과정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질서의 복원을 요구하지 않고, 피해자들에 대한 정의와 배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그들은 또 다른 가능한 세계를 구축하기를 원한다.




<은행들> 다중의 제헌[구성]적 원리들과 분리 불가능한 권리들을 실현하려면 은행들이 공통재를 위해 공동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금융은 민주적 계획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떤 미래 사회에 화폐가 제거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오히려 우리는, 생산수단을 관리하고 교환 수단을 규제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요구되는 몇몇 제도적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화폐는 상품 유통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년에 대비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화폐가 투자의 수단이 될 때, 어떻게 그것이 민주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곧장 우리는 그것의 축적의 수단으로서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화폐를 낳는 화폐란 고리대금업에 대한 아주 오래된 정의이다. 오늘날 그러한 투기적 금융 실천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비난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은행의 역할을 검토할 때, 채무와 불안정에 대항한 투쟁들에 의해 생산된 여러 가지의 제헌[구성]적 원리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자유와 평등,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권), 그리고 사회관계들과 발전의 지속가능성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원리들은, 화폐의 작동과 은행의 활동이 공통재의 촉진에 종속될 뿐만 아니라 소비와 재생산이라는 사회적 필요에 종속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은행들은 언제나 (심지어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도) 사회적 계획화의 기관들이다. 자유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체제에서 이 계획화는 부를 축적하고 사적으로 유통하는 수단을 보장하고 확대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것이 오늘날 은행을 독립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주요한 의미다. 다시 말해 은행이 시민들의 민주적 통제로부터 독립적인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독립은 다른 사람들의 앎과 안전을 위험에 빠뜨린다. 뉴딜 정책의 근본적 조치들 중 하나는 저축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시킴으로써 위험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투기적 조작 속에서 사람들의 저축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더 중요하고 더 기본적인 것은 투자를 시민들의 민주적 의사결정과 참여적 지배의 통제 아래로 가져가는 것이다. 확실히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경험 이후에, 계획화에 대한 기억들이, 심지어 “계획"the plan 이라는 개념 자체조차 악명 높게 되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는 시민들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박탈했고, 사회적 재생산에 잔인하고 강압적인 규범을 부과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과들이 계획화의 기법들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활용하는 공적이고 정치적 권력들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공권력에 대한 우리의 반감과 공적인 법에 대한 우리의 의심은 대개 이 실패한 경험들의 도착적perverse 효과들에서 기인한다. 공적인 것, 즉 사회적인 것을 초월하는 권위는 언제나, 종종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이고 숨막히는, 관료적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 정권들 아래에서 사회적 계획화의 관료주의적 도구로 기능했던 은행의 역할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윤과 지대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은행들의 자본주의적 모델도 거부한다. 두 모델 모두 공통적인 것에 반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적 축적의 수단이거나 공적 계획화의 수단으로서의 은행에 대한 거부는, 공통적인 것의 축적과 계획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모델을 생각할 길을 열어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정치적 생산과 인지자본주의의 시대에는, 생각들, 정동들, 코드, 소통 등을 가지고 작업하는 사람들 같은 주요한 생산력들 중의 일부는 공장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지형을 가로질러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메트로폴리스는 이러한 힘들이 거주하고 상호작용하는 특권적 장소다. 이러한 맥락에서 금융자본과 공조하는 은행들은, 이러한 생산적 역량들capacities을 사업에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집단적인 사회적 능력들competencies을 “결합하고" 파편화된 지식들을 “통합하는" 중심적 행위자로서 시장에 나타난다. 실제로 금융자본은, 생산 조건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은행들과 기업 사이의 관계에 따라 작동한다. 그리고 이것이 최근의 경제적 재난을 가져왔던 하나의 요인이다. 우리는 능력들을 결합하고 지식을 통합하는 이러한 기능이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민주적 계획화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 가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생산은 제한되고 분리된 영역, 가령 공장 같은 곳에 고립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사회 전체를 가로질러 확산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통적인 것을 위해서는 은행이 사라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모든 범위의 생산적인 사회관계들을 등록하고, 양성하고, 후원하는 은행의 기능들이 증가되고 또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자유와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권)이라는 제헌[구성]적 원리들이, 은행을 다른 민주적 기관들의 버팀목으로 만들면서, 은행제도를 관통할 수 있다. 오늘의 투쟁들이, 은행과 금융산업들이 사회적 불안정을 가중시키고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며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을 포함하는, 그 실천들의 부당함을 탄핵하기 위해, 그것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일, 그 투쟁들은, 은행들과 금융수단들이 민주적 참여를 통한 사회적 부의 생산, 재생산, 분배를 계획하는 데 필요한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그것들을 구부리면서, 그것들을 변형시킬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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