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화요일에 있었던 하승우 선생님의 강연 자료입니다. 


하승우 선생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원고와,

크트와 경목이 기록한 강의록,

그리고 제가 빈집 소개 겸해서 작성한 간단한 표를 파일로 첨부합니다.


20121213 하승우 왜 지금 빈집인가.hwp

하승우 강의록-20121213.hwp

20121213 지음 왜 지금 빈집인가.hwp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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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3 ‘해방촌 빈마을 길을 묻다’ 세 번째 자리


왜 지금 빈집인가? : 소유에서 공유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하승우



빈집과의 만남
주인없는 집, 빈(貧)집, 비어있는 집, 손님들의 집. 빈집의 홈페이지에 처음 접속한 날 충격에 빠졌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었다니... 2009년 3월에 다중지성의정원에서 아나키즘 강좌를 할 때 마지막 시간을 빈집에서 가졌다. 그 때의 설레임이란... 낯선 풍경의 해방촌 거리를 걸어가며 빈집의 모습을 상상했다. 빈집에 막 들어섰을 때의 그 충격은.... 별로 없었다. 그냥 집이었다. 수시로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특이했을 뿐, 곳곳에 붙은 알림판이 눈에 들어왔을 뿐, 맥주가 맛있었을 뿐, 집은 평범했다. 그 기억은 그렇게 간직된 채 지나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우연 또는 필연으로, 아나키즘 강좌 마지막 워크숍을 빈가게에서 하게 되었다. 빈집이라는 이름을 주제로 내걸었지만 나는 외부인이기에 빈집에 관해 말할 게 별로 없다. 빈집 홈페이지를 스토킹하고 빈집에 관한 논문을 읽고 빈집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몇 개의 보고서들을 읽었지만 빈집에서 생활하지 않는 내가 체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빈집은 그냥 미끼일 뿐이다. 내가 할 얘기는 그냥 내가 아는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삶, 내가 생각하는 사상, 내가 느끼는 바에 관한 것이다. 어쩌면 빈집과 우리집 사이의 어떤 다양한 변주에 관한 것일지도... 변주이기에 이 글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그냥 느낌이다.

우리집, 빈집, 한국사회: 소유에서 공유로
우리집은 빈집이 아니다. 문이 열려 있지도 않고 같이 사는 사람도, 당연히 장투, 단투도 없다. 나랑 각시랑 애기 셋이 산다. 셋이 살기에 넓은 집이라 가끔씩 사람들을 재운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지는 않고 주로 아는 사람들이 잔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도 원래부터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지금도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잠만 자는 건 아니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런다. 자기 공간이 아니니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며 돈을 내지는 않는다(애가 생기고 나서는 집에 사람들이 잘 안 온다).
우리집에서는 ‘우리’라는 범주가 문제인데, 관계가 없으면 우리로 묶이지 않는다. 더구나 나는 손님을 좀 가린다. 좀 까칠한 성격이다. 관계가 생기면 우리가 되고 같이 먹고 자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남이다. 남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남을 굳이 포함하고 싶지도 않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되고, 남에서 점 하나 빼면 님이 되고, 인간관계는 그런 거라 생각한다. 점을 빼고 찍을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되는가는 관건이지만...
뭐라 정당성을 부여해도 너는 네 집에서 산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미안하게도 우리 집 권리는 각시에게 있다.^^ 게다가 나는 우리집 서열 3위이다. 솔랑군, 각시, 나. 내가 우리 속에 있지만 나 없는 우리는 없다. 뭐, 그런 주의이다.
아이가 생기면서 집에 짐이 많아졌다. 우리 집엔 책장을 빼면 가구가 없다. 있는 가구는 원래 있던 것이었다. 그런 공간에 애가 태어나고 동네 사람들이 책, 장난감, 옷 등을 주면서 짐이 계속 늘어난다. 그래서 물려받은 걸 다시 물려줄 생각도 하는데 받을 사람이 마땅히 없다. 우리 애가 늦은 탓도 있지만. 우리는 원하니 왕창 받고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 ‘순환’이 안 된다. 우리의 문제일까?
예전에 아는 사람들과 ‘지행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고 공간도 구했다. 3층 공간이었는데 2층이 중국집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참 따뜻했다. 단체를 만들면서 처음부터 한 생각은 우리만의 공간으로 만들지 말고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며 자연스레 섞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공간을 쓰고 싶다면 무조건 열쇠를 복사해서 나눠졌다(지금도 누군가는 그 열쇠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런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문을 열고 난장판을 목격했을 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때는 쥐가 출몰해서 다른 사람들의 격한 반응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 때도 문제는 순환이었다. 열쇠를 물려받을 사람이 줄어들고 책임을 분담하지 않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여 갔다.
그러다 돈 많은 건물주에게 계속 월세를 주는 건 부자들을 살찌우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공간을 뺐다. 공간에 있던 짐들은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이 싣고 갔다. 그렇게 실험은 끝이 났다. 하지만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빈 공간이 아니라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이었다. 공간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될 거라 여겼던 관계는 잘 형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는 건 사람이다. 지금도 그때 만난 사람들이 가끔씩 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는 건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적’인 것을 강요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할 뿐 아니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고 이긴 자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니 가진 게 중요하다. 이런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빈집은 ‘섬’이 된다. 그리고 섬은 육지 것들의 식민지가 되기 쉽다.
흔히 소유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유를 내세운다. 그런데 공유가 뭘까? 공유는 公有이면서 共有이어야 한다. 公이 私를 배제한 개념은 아니다. 그건 私와 다른 개념일 뿐이다. 다르다는 것이 차별과 배제를 뜻하지 않듯이, 공유는 사유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공유는 그 있음(有)의 방식이 다르다. 사유가 홀로 가지는 거라면, 공유는 함께 누리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마을에서 공유지는 같이 경작하고 함께 나눠 쓰기 위한 것이었다. 나도 아는 사람들과 지방으로의 이주를 위해 곗돈을 붓고 ‘마을지갑’이라는 형태로 활용하는데, 그것도 일종의 공유지이다. 쓰임새는 사람들이 모여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빈집과 빈마을에서 마을활동비의 의미가 궁금하다. 제목은 마을활동비인데 그 쓰임새는 마을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빈집이 생각하는 마을의 범주가 매우 크다는 건데. 정말 빈마을이 존재한다면 마을활동비가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최근 빈집이 청년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얘기되는데, 빈집이 그런 공간일 수 있지만 꼭 그래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만약 서울시나 다른 곳이 싼 주거공간을 제공하면 그곳으로 갈 건가? 어찌 보면 빈집의 정체성은 주거를 ‘통한’ 새로운 관계 만들기, 자기변화가 아닌가? 자본주의를 거스르는 삶이 아닌가? 그냥 주거공동체는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위기를 지속시키는 것이기도 한데... 빈집이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빈집의 대안은 무엇일까? 빈집의 정체성이 사람들로 만들어지지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있는 것은 다르다. ‘누구의’ 빈집일 필요는 없지만 ‘어떤’ 빈집인가에 관한 고민은 필요할 텐데... 그리고 우리는 규정되고 싶지 않아도 규정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꼭 손님을 환대해야 하나? 도로시 데이는 『환대하는 삶』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오, 어쩌면 우리는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에서 거울 속을 응시하면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서로에게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짓고 있는 죄 말입니다. 점심시간에 우리를 찾아오는 손님을 포함해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물러서 있지 않으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어야 함을 깨달았던 어느 날이 기억납니다. 평소 같으면 잘 해냈을 일로부터도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죠. 누군가의 너그러운 마음은 그 사람의 교만함을 가려 주는 가면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 이제 기도합시다. 기도가 싫다면 다른 건 뭐가 있을까? 빈집에는 어떤 과정이 있을까?

그래, 문제는 정치야!
올해 근 10년을 다니던 대학을 관뒀다. 이런저런 이유가 많았지만 타율적인 노동을 하기 싫어서였다. 어쩌면 목표가 눈앞에 있어서였을 수도 있다. 외부 프로젝트가 아니라 대학이 주는 월급을 받았던 때가 2011년이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만 하면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이들이 목표로 삼는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런 때였기에 나는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게 꼭 회의에서만 구현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니, 민주주의는 회의나 생활만이 아니라 노동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남의 밑에서 굴욕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 일상에서 민주적인 시민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건 모순이다. 학교에서 시민교육이라는 걸 맡았는데, 나는 시민으로 대우받고 있나, 시민으로 살고 있나, 지는 그렇게 못 살면서 학생들에게는 뭐라 그러고, 이게 무슨 뭐같은 경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확 관둘 수 있었다.
예전에 돈을 좀 벌 때는 ‘보험’이라는 걸 들었다. 보험회사에 드는 보험은 아니고 사람들에게 든 보험이었다. 돈을 많이 벌었어도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이 별로 없었다. 후배들이 밥 먹고 싶다면 밥 사주고 술 먹고 싶다면 술 사주고 형편이 어렵다 그러면 그냥 돈을 줬다. 시민사회단체들에 후원도 많이 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겠지, 사회가 좀 좋아지면 내가 살기도 편하겠지, 그게 보험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즐겁고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었기에 보험을 드는 과정이 즐거웠다. 물론 위험부담은 크다.^^ 그리고 요즘처럼 벌이가 없을 때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학교를 관둔 후에 계속 모임을 만들었다. 같이 공부하는 모임을. 여러 개의 모임을 하고 있는데, 즐겁다. 그런데 모임을 통해 돈을 벌진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뭘 하냐? 알바를 한다. 이게 은근 악순환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전혀 생뚱맞은 알바를 하는 건 아니고 내가 관심 있는 자치나 풀뿌리 쪽 일을 하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우리는 스타일을 중시 여긴다. 나는 그런 스타일이 없다. 머리 깎으러 갈 때마다 난감한 질문이 “어떻게 깎아드릴까요?”이다. 그러면 그냥 알아서 깎아주세요라고 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헤어스타일이 내 정체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런 거 따질만한 외모도 아니다). 하지만 누가 나의 인간됨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좀 진지해진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슷하다고 본다. 자치는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집요하게 던지는 과정에서만 가능하다. 회의를 자주, 많이 한다고 자치하는 건 아니다. 그 이전에 자신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우리가 정말 동료인가? 동료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일이 놀이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목수가 집을 짓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지만,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목수의 기술이 아니라 그 집에서 살 사람들의 욕구가 집을 성격을 결정한다.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놀이를 통한 즐거움과 일을 통한 보람이 반드시 달라야 할 필요도 없지만 꼭 같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몇 일 밤을 새면서 한 일의 성취감과 몇 일을 놀았던 즐거움은 좀 다른 결이다.
예전에 무슨 3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봤는데, 무박 몇 일로 훈련을 하는 군인들이 나왔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런데 그 훈련을 마친 군인들은 엄청난 동료애와 자기만족감을 보였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저런 느낌을 왜 군대에서 받아야 할까? 어느 순간 우리는 힘든 것을 피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꼭 피해야 하나? 누군가는 소도 키우고 뭘 치우고 해야 할 텐데...
관건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방법이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여러 사람의 힘이 모여야 한다. 빈집은 그럴 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 빈고가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빈고가 뭔가 새로운 자급양식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빈고는 그냥 빈집을 유지하고 늘이는 역할을 할 것 같다. 요샛말로 얘기하면 ‘착한 자본’?(미안!^^;;) 착한 자본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착한 자본은 누군가에게 그냥 자본일 뿐이다. 착함은 내부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평가일 뿐이다. 빈고의 지향은 뭘까?
그리고 빈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좀 궁금하다. 한국사회는 너무 주인이 분명한 곳 아닌가? 주인 없는 빈집의 투숙객들이 공간을 공유할 뿐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존재라면, 빈집은 반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내 속에 스며든 자본주의, 내 속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조절하는 건 쉬운 과정이 아니다.
그리고 삶을 공유하는 과정은 무척 피곤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 피로함을 좀 줄이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모든 공동체에는 탈퇴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울러 탈퇴한 사람이 잠시 머물 수 있거나 이주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준비가 필요하다. 빈집은, 아니 빈집의 투숙객들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옛날식으로 얘기하면, 아나키스트들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먹고 일하고 생활하는 장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는 단지 우두머리만 바꿀 뿐이다.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가리는 또 다른 의미는 아나키즘이 임금제도와 사적 소유권, 대규모 공장노동, 지나친 도시화를 반대하는 사상이라는 점이다. 우두머리 없는 사회는 왕이나 대통령의 목을 벤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존엄하게 일하고 자유와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만 아나키즘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

함께 살자?
빈집이 꼭 마을이어야 하나? 정주하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라 여긴다면 그곳이 꼭 마을일 필요는 없다. 빈집, 빈가게, 빈마을을 잇는 결정적인 동선은 무엇일까?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 동선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사는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지...
사실 공동체는 하나이지만 코뮨은 하나일 수 없다. 아니, 코뮨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작은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권력이 없어져야 하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사상이라는 편견이다. 하지만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작은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와 전 지구의 변화를 꿈꿨고, 지구상의 단 한 명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면 나는 자유로운 게 아니라는 바쿠닌의 얘기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먼 거리를 돌아다니며 혁명의 불씨를 지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꼼뮨들의 꼼뮨을,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꿈꿨다.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건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꼼뮨이었다. 꼼뮨에서 인간의 자아와 자유는 제한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자아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꼼뮨들의 꼼뮨을 통해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억압적이지 않고 존엄한 노동질서를 만들며, 더불어 살고 함께 누리는 관습과 문화를 지키는 것, 그것이 아나키즘이 꿈꾼 세상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왜 작은 공동체들이 지속될 수 없고 실패하는가라고 물으면서 종교적인 규율이나 소수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공동체들이 결코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자율적인 삶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꼼뮨은 작아야 하지만 그것이 폐쇄적이거나 물리적인 거리로 측정될 수는 없다. 프루동이나 크로포트킨이 연방주의를 궁극적인 대안이라 봤던 건 공동체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어야 버틸 수 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어야 흘러넘치지 않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람들이 다양해질수록 다양한 성격의 빈집이 필요하다. 도시는 그런 공간이다. 함께 살자는 구호가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여럿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여럿을 누가 선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국가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럴싸한 형태를 자본이나 국가가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하나도 여럿도 아니다. 비어 있으면서 열려 있는 삶이 그렇게 실현될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고정된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런 경계를 만든다. 경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경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명제가 모순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자연적이지 않은 사회에 살면서 자연스러움을 기대하는 것도 비슷한 모순에 빠진다. 똥인지 된장인지를 알려면 찍어 먹어봐야 한다. 모순을 깨는 사유는 불가능하다. 한번 찍어먹어 봐야지. 찍어먹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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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3 ‘해방촌 빈마을 길을 묻다’ 세 번째 자리

왜 지금 빈집인가? 왜 지금 빈집이 아닌가?
지음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 세가지 교환양식, 자본=네이션=국가


 

통제

 

불평등

B : 재분배

A : 호수

평등

C : 교환

D : X

 

자유

 


A

증여와 답례

네이션

우애

공동체

국가사회주의(공산주의)

생시몽, 라살

B

탈취와 재분배

국가

평등

국가

복지국가자본주의(사회민주주의)

사민주의

C

상품교환

자본

자유

도시

리버럴리즘(신자유주의)

고전경제학

D

X

X

X

X

어소시에이션 / 꼬뮌

프루동, 맑스


    각각의 상호관계 
    자본=네이션=국가(A=B=C)의 삼위일체, D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바가 없다.
    B가 약해지면 D도 약해진다.
    D에 대한 실망이 A, B, C로 향한다.



빈집?


 

통제

 

불평등

B : 복지시설

A : 공동체

평등

C : 숙박업소

D : 빈집

 

자유

 



A

(이념)공동체, 가족

우애

폐쇄,고립

환대

손님맞이, 놀러가기, 마을잔치, 집바꾸기

빈집들?

B

(국가)복지시설

평등

방관,통제

자치

회의, 살림, 계약, 동아리, 마을활동

빈고?

C

(상업)숙박업소, 공동주거

자유

독점,경쟁

공유

선물, 출자, 상호부조, 빈고

빈가게?

D

(협동조합)빈집

 

 

 

 

빈집?


    X로서의 빈집
        A 공동체이지만 누구나 올 수 있다. : 열린 공동체 : 환대
        B 모두가 평등한 주인이지만, 강제는 없다. : 자발적 활동 : 자치    
        C 분담금은 내지만, 자본에 따른 차별은 없다. : 반자본주의 : 공유
    빈집에 대한 실망
        A 공동체성의 퇴색, 개방성의 피로, 가치의 상실, 관계의 상처, 이별의 두려움
        B 공유지의 비극, 환대의 의무 상실, 보살핌의 실종, 주인/활동가 부재,
        C 출자의 감소, 분담금 상승, 자기자본 확보, 가게의 실패,
    실망에 따른 반응
        A 새로운 공동체로, 가족으로 회귀, 가족만들기, 다른집 만들기, 등
        B 규칙만들기, 마을활동비, 집사회의, 대의제, 방관, 지원사업으로, 국가/서울시/마을사업, 등
        C 직장으로, 시장으로, 자기저축, 자기보험, 고시원, 쉐어하우스로, 출자를 위한 장치, 등
        D 우리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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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속기록


- 작성 : 크트, 경목(해방촌연구소 연구원)


지음: 빈집 소개
하승우: 왜 지금 빈집인가? 저도 잘 몰라서 질문을 던져봤다. 빈집일까?라는 질문을 던졌어야 했는데...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안나오더라. 우연찮게 홈페이지를 봤다. 당시 위키여서 만들어가는 상태. 좋은거 같은데 실감은 안난다... 다중지성의 정원 강좌를 통해 빈집 다니는 사람 알게 되어 세미나를 같이 했다. 녹사평 역에 내려 굉장히 기대하고 왔는데... 그냥 집이더라. 모임을 하는데 중간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다. 뭔가 독특할 것이고 특이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막상 다르지 않다. 설명서 있고, 옥상 공간 이용 등 특이한 점.
오늘 dlfWLr와서 많은 얘기 나눴다. 예전 빈집- 현재 빈카페가 있고, 중간 해방계라는 계 한번도 안나왔지만 몸 담고 있다가, 빈고라는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도. 내가 빈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협동조합 관심 많아서, 한 살림, 민우회생협 같은 곳을 보면서 고민하는 단계, 수준이다. 내가 봐왔던 운동이라는 점에서 빈집은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궁금하다.
나는 용인시에 산다. 인구 100만 정도. 3%의 땅에 1/3 인구가 살고 있다. 아파트가 많다. 외지인이 산다. 그래서 관계가 별로 없다. 2008년도 아기 출산, 처가 근처에 살아야 기생하겠다 싶어 이사를 갔다. 느티나무 도서관(작은도서관 운동)이 있어서, 인상에 남는 곳이었다. 강의 갔을 때 사서 대상 강의였는데 어린 초딩이 집에 안가고 있었다. 이 작은 친구가 도서관을 안내해주겠다고 나서서 지하부터 3층 도서관 공간을 안내해줬다. 이것이 충격이었다. 내 도서관, 우리 도서관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도서관 운영하는 방식이 그러했다. 도서관이라는 곳을 매개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집이 있고, 빈집이라고 하는게... 비어있는 집이라는 공간, 주인이 될 수 있는 집인데 나는 그 중간, 사이에 있고 싶었다. 내 집에서 점프하기 힘들고.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보니까 공간분할에 대한 필요와 욕구가 생기더라. 내 집, 우리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아내, 아기와 셋이 살고 있는데 셋이 살기엔 조금 큰 공간인데. 사람들을 집안으로 많이 끌어들인다. 집에서 하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 와서 먹고 술마시고, 늦으면 잠도 자고 이런 공간으로 생각을 했다. ‘우리집’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내 집’과 ‘우리 집’의 차이점은? ‘우리’라는 범주 안으로 들어오는 것, 남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아닌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곳. 동네 사람도 있고 조금씩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라는 범주에 못들어오면, ‘내’집 밖에 안되는 것이다. 관계가 없는 사람들과는 그렇다. 집을 혼자쓰는 공간보다 같이 쓰는 공간이라 생각하고 있다.
저는 대학에서 정치학 전공하고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풀뿌리민주주의, 개인적 관심사는 아나키즘이다. 예전에는 같이 산다는 생각 못해봤고, 결혼해서 가족이라는 범주를 만든다는 걸 생각못해봤는데, 사람이 살다보니 결혼도 하고 애도 생기더라. 작년까지 대학강의 하다가 올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평등과 불평등, 자유와 통제’라는 말을 지음이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학교가 국가 통제하에 있는 공간이었다. 학기말만 되면 학생과 내가 권력관계에 놓이게 되고, 불편해서 관두었다. 현재 백수상태로 12개월 지내고 있다. 고민이었다. 학교는 일자리 개념도 있는데, 육아비용도 필요하고... 학교 관둘 수 있었던 배경은 ‘우리집’이 있어서였다. 동네에서 얻어 쓸 수 있는 것들 있겠다. 장난감, 책, 옷 등 동네에서 걷어 입히는 것. 혼자 산다라고 하면 개인적인 비용으로 처리해야하고, 학교에 나가 원하지 않는 노동을 해야하고, 스트레스를 또 풀어야하고. 그 노동 하지말고 개인적 필요를 운동으로 풀어가면 되겠다 싶었다. 불편한 것이 많다. ‘우리’라는 범주로 들어온 사람들
‘다 주세요’하니까 동네사람들이 마구 준다. 그러니 우리집에 물건이 막 쌓인다. 그런데 내가 줄 수 있는 곳이 없다. 애가 입은 옷, 쓴 물건 등 누가 받아 쓸까? 하는 고민도 있다.
지행네트워크 공간, 필요한 사람에게 열쇠 주고 열었다. 모임에서 공간 필요한 사람이 사용했다. 아무런 규칙도 없이 했다. 어느 날 가보니 누군지를 모르겠더라. 열쇠를 20개 정도 복사해서 썼으니까. 누가 왔다 갔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날은 개판이 되어 있고, 쥐가 쓸고 다닌 적도 있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규칙을 만들어야 하나? 쓰는 사람들이 규칙을 만드는데, 규칙 안따르면 오지 말라고 해야하나? 귀찮다, 참고 살자... 가다가 어느 순간 한 사람이 빵 터졌다. 규칙 만들면 좋겠다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가 제안한 것은 월세가 80만원이었는데, 집 주인이 매달 3, 400만원을 집세로 가져가는게 너무 열받아서 공간을 빼버렸다. 지행 실험은 실패하고 홈페이지만 남아있다. 그 때 공유, 소유라는 것의 차이를 생각하게 됐다. ‘평등’이라는 지향이 가능하게 되려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소유’는 매우 익숙하다.
내가 할 수 있는 활동반경에서 가능한 것은, A(공동체, 가족)의 범주를 넓히는 것이다. 근데 빈집은 처음부터 공동체, 가족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곳이었다.
지음: 요즘 연구소에서 고진과 하비의 책을 읽고 있다. 거기서 빈집의 이야기가 나온다. 평등과 자유가 당연히 좋은 가치로 생각하는데... 처음 빈집은 번호키였다. 2월 21일 생겨서 0221로 진짜 여러 사람이 오고 사용했다. 근데 끝내 안바꾸고 4년 사이 도어락이 망가졌다. 0221자리만 망가졌다. 같은 문제로 너무 관리가 안된다 하면, 뭔가 규칙이 필요해지는 단계가 온다.
하승우: 처음 시작할 때도 개인 공간이 없지 않았나?
지음: 게스트하우스로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누구든지 올 수는 있다라는게 컸던 건데, 단기투숙객이 많을 때는 게스트하우스 성격이 강해진다.
하승우: 자유는 아무것도 안가진 상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상태에서 가능하다. 빈집이 개인공간이 없는 ‘공간’이지 않나.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 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내부의 합의에 의해 있었을텐데.
지음: 처음에 돈이 없어서 남자방, 여자방으로 나눠졌고...
하승우: 마을활동비 등 집이지만 마을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것도, 그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마을’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빈집 관련 논문이나 홈페이지를 보았다. 왜 마을이라는 단어가, 그 말이 나오게 된 계기가 뭘까 굉장히 궁금했다.
살구: 빈집이라는데서 집에서 살아가기를 하면서 1, 2년 재미있게 살았다. 집에서 못할 것 같은 것을 많이 해봤다. 많이 오고 들르는 사람들 사이 공감대가 생겼다. 근데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 빈집이 늘어가는 것이 빈집이 확장의 방식인가 고민되었다. 우리가 바깥에 대고 우리가 살고 싶은 방식을 알리는 것도 마땅치 않고. 빈집 안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말고 바깥으로 퍼져나가면 좋겠다 싶어서, 마을활동비도 생기고.
지음: 마을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집들이 늘어나는데 사람들이 계속 이동을 하게 되더라. 분담금을 걷다 보니 집마다 집값이 다른게 참기가 어려웠다. 그게 자연스럽기는 한데 사람들이 ‘평등’ 분담금을 맞추어야 된다, 이런 여러 문제가 있어서. 재정을 통합했다가 분리했다가 그 과정에서 마을 금고를 만들게 되었다. 빈집도 헷갈리는데, 빈마을은 뭐냐 하면 여전히 애매하다. 집들이 늘어나니 마을 잔치, 회의도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집들사이 반목이 생겨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한다.
하승우: 최근 마을을 사업으로 생각한다. 마을 축제를 한다 등, 사업을 통해 마을을 만들겠다는 식으로 간다. 빈집 경우 ,A 또는 C의 정체성인데, 한국사회에서는 B로 간다. 운동으로 가려면 반작용이 필요하다. 마을 만들고 싶으면 운동의 형태로 가야하고, 그럴려면 힘을 조직해야하는 게 과제이다. 마을 활동비라는 것이 만들어지거나 유지될 수 있는, 조직되어야 하는 것인데.
지음: 그것을 하려고 하다가 잘 안되었다. 끝장났다.
살구: 공간 특성이 사람들이 들고 나니까, 처음 논의 한 사람과 그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이 ‘빈마을’이라는 개념을 달리가지면서 논쟁이 있었다.
하승우: 빈집은 여러개 늘어나면서 같이 묶을 수 있는 형태로 빈마을이 나왔던거고. 요즘 마을 사업은 국가에서 공동주거로 내려와서 공동숙박업소 아니 공동주거를 만들어가는 생각이 대세이다. 국가가 원하는 것은 C형태로 가는 것이다. 마을 활동비는 생각하는 것의 차이의 문제이고 문제가 발생하는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빈집은 공유공간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반면 한국사회는 소유개념이 매우 강한 분위기고. 사유화된, 개인끼리 경쟁이 심하고 내면화된 교육을 받는데,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공유란 개념을 얼마나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소유가 과연 양자가 양자를 배제하는 개념인가 잘 모르겠다. 소유하는 사람들은 정말 공유가 없는 것인가? 내집-우리집-빈집이 있는데 우리집은 그 중간형태이다. 소유에서 공유로 점프할 수 없다면 중간에 우리가 많아지고 강화되는 것이 마을이 되는, 징검다리 형태로 가는 것. 공유라는 것은 공유지를 만드는 것인데. 한국의 전통적 공동체를 보면, 자연스럽게 공유지라는 게 있더라. 소유가 불분명한 땅들이 마을에 있으면 공동경작과 두레하면서 자연스레 마을에서 축제를 열고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주는 것. 공유지에서 나는 것들을 어떻게 쓸거냐로 논의하고 회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평등과 불평등의 간극을 좁히는 방법은 A와 B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무언가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현재 C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가는데 사유화된 공간을 넓혀가는 것... 재단이나 정부 돈이 많이 풀리는데 ‘마을’내 비슷한 내용으로 경쟁하는 마을 생긴다. 마을하면 협동하고 아름다운 건데, 내부에서 협동이 안되는 상황 벌어진다. 마을 유지비용도 굉장히 많이 든다. 마을 하면 카페, 가게도 있어야 될 것 같고 축제도 있어야 될 것 같고. 공유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까 외부의 것을 끌어들여서 하고 있다. 이게 자유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마을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미 현실속에서 마을을 뒤틀린 형태로 드러나는데,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게 우리 스스로 착시현상을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개념이 가진 명확한 것이 있겠지만, 우리가 진짜 생각하는 소유와 공유의 의미가 뭔지, 어떻게 그것을 파생시키고 싶은지, 공유를 통해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으면 애매모호한 지점이 생긴다.
사례를 말씀드리면, 한국사회 좋은 공동체라 말해지는 곳이 있지 않나, 성미산이나 홍성 등이 있는데. 저는 그런데 가면 꼬투리만 잡는 사람이라 아름다움을 못본다. 성미산의 실체는 성산1동에 있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었다는 거고, B와의 갈등으로 생긴 것이고. 배수지 싸움으로 사람들끼리 지역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것이다. 주민들간 정체성도 다 틀린데, 두레생협, 공동육아도 있지만 외부 자원이 많이 들어갔다. 마을만들기 사업 등 사업적으로 만들어진 점이 많다. 뜯어보면 많은 것이 드러날 거다. 생산하는 마을이 아니라, 잠자는 공간이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가능한 곳이다. 마을주민의 범주가 정해져있다. 공동체라고 말하지만 자기들의 공동체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라는 범주가 있는 공동체인데 설명될 때는 넘어선 것처럼 말해서 문제가 있다. 홍성도, 도로 아스팔트가 들어와있고 인도가 별로 없다. 유기농단지이긴 하지만 한국사회 문제는,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하는데, 외부 가공공장을 운영하게 되고, 생산하는 사람들 필요에 의해 가공을 만들었는데 가공 유통하는 곳의 권한이 강해진다. 외부적 조건들이 그런 것들을 강제한다. 이곳을 소비공간화만든다. 생산하는 곳에서는 소비역할을 할 수 없으니 유통시스템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상적 마을 공동체라고 하는데, 보여지는 것만은 되게 행복한데 살거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다 허상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게 아니다. B와의 관계 속에서
빈집에서 빈마을로 가려면 빈집의 결의도 중요하지만, 빈마을이 한국사회에서 자기 역할, 위상, 성격을 어떻게 유지시켜 나갈것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외부에 기대지않을 수 없을것이다.
빈집에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읽다가, 결이 다른 생각을 했다. 일과 놀이의 문제였다. 놀이처럼 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하는데, 일을 일로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즐길 수 있는 것. 일은 일처럼 하는 게 필요하고, 놀이도 놀이처럼 하는게 필요하다. 다큐멘터리 3일에서 봤는데 무박 훈련... 처음에는 황당하다 생각했다. 마지막 훈련이 끝났을 때 사람들이 막 울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느낌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라고. 혼자있었으면 절대 못했을 거다 라고 하는 말들. 왜 스무살이 넘도록 우리는 같이 치열하게 하면서 즐기게 되는 성취감들 그 경험의 기회 없었을까. 자기 성취감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겠구나... 그런 것들을 어떻게 우리가 만들어갈것인가. 아는 분이 ‘어쩌면’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는데 제가 월세는 낼 수 있냐 물었다. 낼 수 있다고 했는데 알바를 해서 유지하고 있단다. 해방촌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지음이 우리는 좀 나아요, 라고 대답했다. 왜 이 말을 하면, 좋은 열정도 높이 사지만, 나름의 열정이라는 것이... 해방촌 카페 만든 이유도 나가서... 밖에서 자기 결정권없이 일하는 사람이 집 안에서는 자기 자유를 누리면서... 노동의 문제도 있지만 마을의 문제도 있을것 같다. 빈집을 모르는 사람들은 빈집을 알릴 수 있는 공간으로 카페, 접촉면이다.
카페는 유지 뿐만 아니라, 카페로서 기능해야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빈집사람들이 같이 이해하고, 타자적 공간이 아니라 자기공간으로 인식하면서 할 것이냐, 그게 어려운 과제이다. 다시 해방촌 가게로 옮겨 만든 건 나름의 뭔가가 있었던거 아니냐.
지음: 빈집 사람들 외부에서 돈 벌어오고, 각자 벌어온 것으로 사는 공간이었는데. 이렇게 일하는 게 싫고. 약간은 모여있으니까 주거비 적게 들고,
집에서 가족이 하는 일이니까 한다가 아니라 마을 차원으로 넘어가면... 마을 활동비 취지 중에 여기서 노동하면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있었다. 여기 카페도 장사가 만만치 않아서 C로 가게 되고. 사람들 지쳐서 나가고. 공동체이니까 같이 책임져야 하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A로 넘어갔다가, 잘 안되니 다시 B로 넘어가서 지원을 좀 받아볼까 하면서 ‘접자’이야기를 해본건데. B로 가는 것도 해보자, 마냥 피하는 것이 답은 아닐거다. 약간의 자립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보자 한거고.
하승우: B도 있지만, 협동조합이 자유로우면서 평등한 D도 있는것이다.
지음: 잘 안되니까 정면돌파하게 되고 눈을 돌리게 되는데 (정면돌파의 어려운 점은?)
그동안 생활을 감내해야하고, 다른 수입을 외부에서 벌어와야 하는데, 시도해보니 그것도 어렵더라.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피폐해지는 구조더라. 사람이 힘들어지면 같이 하는 사람들 발란스도 깨지기 쉬워서 다른 방법 고민했다.
하승우: 자원의 문제도 있지만, 협동조합 기본법 5인 이상이면 가능하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외부에 이야기하면 쉽게 생각한다. 취향의 공통, 관계가 묶여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시작도 어렵다. 떡볶이 가게도 프랜차이즈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같은 취향과 일에 대한 욕구도 비슷해야 하는데. 도시라는 공간이 다양한 취향, 욕구
지음:대부분의 협동조합은 그럴 것. 동업하는 건데 절대로 하면 안되고 끝 안좋은게 동업이니까. 이름만 협동조합 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기업과 안 다르게 될 수도 있고. 우리끼리 놀고 돈 안 벌어도 친한 걸로 하는. 사실은 제 살 깎아 먹으면서 갈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
하: A 형태 공동체로 봐야 하나. 외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공동체?
지: 그게 애매하다. B나 C에서 일한다고 하면. A만으로는 안되는게 문제인데. 어떻게든 B나 C에 의존하면서 그게 아니면 안되니까.
하: 학교 그만두고 공부 모임 많이 만들어. 재미있다. 그런데 공부모임만 해서는 못살아. 돈 벌어야 사니까. 돈 버는 방법은 원고 쓰고 강의하고. 하지만 한국 지불시스템이 원고 마감은 있는데 입금일 마감은 없어. 몇 달이 지나도 안 들어와서 혹시 물어보면 그때야 지급. 버릇이 된게 매일매일 은행잔고 체크. 돈이 들어왔는지 안들어왔는지. 학교 그만둔 건 하고 싶은 거 할려고 그만둔 건데.. 몰입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경제적 문제로 곁눈질 해야 하는 문제가 생겨.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 같이 사는 사람도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수 있어. 어떤 형태가 가장 좋은가 생각해보면 근처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 한국 사회에서는 프렌차이즈화해서 지역 경제가 안되는 것. 집 근처에서 일자리 찾는게 아주 어려워져. 협동조합으로 만들어도 성공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 빈집도 빈집 수는 늘어나는데 삶은 어려워질 수도. 위안될 수 있는 장소일 수 있지만 이 장소도 어느 순간되면 바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늘어나면서 어려워질 수 있어. 빈집 늘어나는게 좋을 거 같다. 사람이 늘어나면 그것 자체가 가지는 것이 있을 것. 빈집 사람들이 만들고. 어려워지는 이유는 생산 혹은 소비만 하면서 외부에 끌려가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일정 정도는 내부에서 가능. 자급이 가능해지는 것. 정체성은 상당히 다양하더라도 외연이 확장되면 그 내부를 운영할 수 있는 경제규모가 생기는 것. 그러면 이런 카페를 많이 만들어 일자리 창출하는 것 아니라. 빈집이 늘어나면서 내부 경제적 필요 충족시키는 내부 활동들 생길 것. C가 가지는 잠재력은 그런 것. D형태로 올 수도 있는 것. 규모의 경제. 협동조합. 외부의 업체가 들어와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을 뿐 아니라 생산까지 같이 할 수 있는 D로 올 수 있는 디딤돌 만들어져. 지금 규모로는 안되고 확장시켜 나가야. 빈고도 조합원수 늘어야 하고 빈고 스스로의 결정력. 만들어나가는 것이 늘어야 하는데 자료로만 봐서는 빈고가 원활히 잘 운영되고 있나.
지:빈고는 운영 자체는 안정적 각 공간과 집에 보증금 대출하는 신용협동조합이니까. 품이 필요하거나 일이 중요한 건 아니다. 운영은 안정적인데 출자가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 손실이 안되는 조합. 자기 보증금 출자한 조합이니까 안정적으로 가서 딱히 어려움 없는데 우리가 전체적으로 가난한 문제. 보통 혼자 집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빈집에 오는 경우는 없으니까. 1인당 출자금이 줄어드는 경향 있어. 그 와중에 전셋집이 있었는데 월세 여러개 구하자고 올해에 진행. 출자금은 줄었지만 집 수는 늘어나. 빈고는 안정적. 문제는 그래도 출자금 더 받아오려면 외부적으로 사회적 의의 등을 만들고 할 필요 있어. 내부출자도 내부출자지만 한계가 있으니까. 한계 극복하려면 내부적으로 정확히 가져가야. 정관은 없고. 돈 필요할 때 기술적인 것 써서 고리의 빚이 있다거나 한 것은 빈고가 갚고 빈고에 이자 내라고 한다든지. 쌈짓돈 비상금 빌렸다가 쓰는 경우도 있고. 여행가고 싶은데 안되냐고 하면 상품 만들고.
하:신용조합 발전은 지역색이 있어야 하는 것. 상품이 그때그때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빈마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신용과 관련돼 있는 나름의 것. 1금융권 2금융권 관련. 사람들을 알고 있으면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생기지 않나. 기존 관계망 속에서 거래되는 것. 지역을 토대로 해서 사업을 오히려. 빵꾸가 나면 안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지역 배경으로 하는 사업들. 빈고가 할 수 있느,s 것들 만들어가야. 그것이 외연 확장시킬 수 있을 것. 빈고도 빈집의 접촉면이 될 듯. 신용조합이 강력했던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조직해 대출해줬기 때문. 동자동 사랑방이 가능한 것도 가난해서 유지가 되는 것. 필요에 맞는 대출을 만들어주니까 상환률 100% 가까이 되고 관계 조직하는 것. 빈고라고 하는 것도 그런 방식으로 간다면. 마을 사업이기도 하면서 빈고 통해 빈집을 늘려가는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지:빈집 자체 개념이 애매하니까 빈집들이라고 하는 곳도 있었는데 보증금 빌려주거나 월세 조정 빈고가 했는데 가게 만들고 하면서. 가게 대출하고 가게도 공간인데 공간 대출하면서 빈집 아닌데 대출. 공간 구해놓고 돈으로 공간을 구하고 공간을 공유하는 형태로 시작했던 거라면 뒤로는 공간이 어렵기 때문에 누구나 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 있고. 차라리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오거나 하면 집을 구해주면 되지 않나. 보증금을 구해주고 살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그런 형태로 간 것. 돈으로 공간을 공유하는 형태에서 돈을 공유하는 형태로 확장. 빈집을 공유한다고 했을 때 보증금을 공유했던 것. 자본 수익을 공유했던 것이고 똑같은 형태로 공간을 확장하는.. 형태로 대출이 일어나게 된 것. 가계. 이런 관계들을 계속 만들어나가는 것. 이런 형태로 가고는 있는데.. 쉬빚는 않다. 그 과정에서 다시 빈집이 뭐냐는 질문이 나오고. 빈집을 위한 빈고였는데 빈고가 다른데 대출한다면. 이 방향은 정할 필요가 있다. 총회 준비를 하고 있다.
하: 다른 것이 뭘까. 우리집 개념. 내집 우리집 빈집이 있는게 아니라 다른집 대출이 안되면 빈집도 우리집 개념이 들어와. 빈집이기 위해서는 빈집이 자기 기능 하기 위해서는 노동 문제 등 과제가 있을텐데. 그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할 위치가 있는 거고 그 이상 하기는 힘들 수도 거기에 대한 과제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한가지 생각이 드는 것은 있다. 빈집도 집인 거잖아. 집도 중요하지만 빈도 중요. 두 개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같이 있는 형태인 건데 집이 강조되면 빈이 사라져. 빈이 살아나야 집도 유지. 한국사회의 주거구조, 서울에 사는게 고비용 구조인데 분담하고 있으니 지금은 낫지만 갑자기 해방촌을 재개발하는 순간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져. 그것을 버텨낼 힘이 있는가. 그것이 벌어지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힘은. 엮일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가능. 이것이 집만 강조되다 보면 집 자체도 가져올 수 있는 나름의 어려움들. 담허물기 운동이 위기가 왔던 것도 해당 지역에 재건축 허가가 났을 때. 재건축 찬성과 반대로 갈리게 되는. 극복했는데 극복할 수 있는 나름의. 블록 자체가 됐으니까 가능했던 것. 빈집처럼 떨어져 있는 구조에서는 거기에 대한 어려움도 있을 것. 사회적 상황변화 대처할려면 외연을 확장해야. 공동체는 자족적일 수 있다. 자기들끼리 잘먹고 잘살 수 있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마저 줄어들어. 외부로 서비스 받아와야 하는데. 그런 공동체가 자생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데. 다른 자유와 평등의 형태가 유지되려면 하나의 코뮨으로 안되고 여러 코뮨이 만들어지고 연계를 외치면서 움직이지 않으면 외부가 강요하는 압력에 지탱하지 못할 수 있어. 이렇게 되면 강력한 리더십이 나올 수 있는데 이도 긍정적이지 않아. 빈집이 해방촌 환경 변화 다라 고민해야할 시기가 올 수 있는데 한국의 대부분 사업들은 그때 가서 고민하면 늦어. 이를 예방할 방법은 경계의 문제. 이것이 열리지 않으면 올 수 밖에 없는 위기가 있다. 빈집에 가졌던 좋은 느낌은 집의 성격이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변화. 하나의 성격이 있고 맞춰서 사는 것이 아니고. 변한다는 것. 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빈집이라 가능. B의 구조와 빈집 유지 위해서는 지역 주민 참여 많이 되는 곳은 마을 비전을 많이 만들어. 주민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 것 만들어야 자기들이 살아야할. 누가 밖에서 밀고 들어오더라도 이런 것이 있었어. 누군가가 던져 놓는 틀에 갖히기 쉬워. 비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는 거고 그런 계획 짜는 것. 여기도 지금 당장의 구상 있겠지만 빈집 빈마을이 갖고 있는 틀들. 지금도 있는 건가?
지: 글쎄요. 딱 그이야기를 해야할 시점인 거 같다. 빈고도 마찬가지고. 빈고 입장에서 빈집이라는 규정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공동체가 어떤 식이든 기능할지. 빈마을도. 빈집 혹은 빈마을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고 좀 더 열린 구조로 이 동네에 있으면 해방촌 차원의 계획들 대략적으라도 같이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와 있다. 빈마을 회의 집사회의라고 했던 것들은 여기에 누가 들어올 수 있는가. 빈집들끼리 서로 도와야 하는 것이 있는데 어디까지 할거냐 말거냐 논의 진행되면서 그것 자체가 그런게 나쁘다는게 아니고 지급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표에서 A B C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게 뭔지 알고 갔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B로 가자고 하면 반작용 있을 수 있으니까. 비슷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스스로도 어떨 때는 B 어떨 때는 C 이야기. 그것 가지고 Asi Bsi Csi 가지고 싸우는 것은 아닌 거 같다. 빈집 아니어도 여기 저기서 많이 왔는데. 빈집이냐 아니야 애매할 때 많은데 그게 그러헥 중욯,s 것은 아닌 거 같다. 알아서 잘하자는 사람도 있고. 큰그림 같이 그리는 작업 필요.
하: 빈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뭔가?
지: 글쎄요.
크: 자치 공유 환대.
지: 추려본 키워드인데.. 맨 뒤에 보면 표가 있는데. 공동체는 우애라는 가치가 있지만 폐쇄적으로 되기 쉽고. 이런 경향이 있어서 이런 것을 극복하는 가치로 환대라는 것이 아주 중요. 평등이라는 가치도 아주 중요했는데 빈집이 국가와 반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했는데 포함하는 것도 있었다. 어디도 갈 데 없는 사람 받는 기능도 빈집이 해. 그렇게 와도 우리는 평등하게 다 같이 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러 s가치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애매한 것이 있어. 그래서 공유지 비극. 모두가 주인이라고 하지만 모두 주인이 아닌 때도 있고. 그런 것 극복 위해 자치가 필요했던 것 같고. C는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인데 결과적으로는 독점 경쟁이 되기도. 이런 것을 넘어서는 방식 자체가 공유라는 키워드가 아니었나. 이런 가치들이 있었고 그것과 관련된 장치와 실천이 있어.
다수- 사람. 손님. 각각 다 다를 것.
하: 사람은 어떤 건가?
나마: 빈집 성격이 다양하니까. 내 생각에는 막연하지만..
**:연대라고 생각했는데. 빈집이 지향했던 가치나 하고 싶은 가치 안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생각해. 그것이 사람과 같은 것 같다. 사람간 연결 네트워크가 우리가 가진 유일한 힘이고 가져갈려는 유일한 힘. 공도으이 비전이나 추구하는 공통의 목표 없으면 의미가 희박해지는 과정 겪었던 것 같다. 애초에 있었는데 계속 공유되면서 변형되면서 그 순간과 지금에 맞게 왔어야 했는데 말만 살아남았을 수도. 그래서 지음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 그 이야기를 해야할 때인 것 같다. 문제의식의 핵심인듯.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좋아서 계속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올 때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극복할려고 하면. 돈만 목적이면 돈 벌면 되는 거고. 하지만 여기서 삶의 모양새 사람들의 모양새가 좋았기 때문이 있을 것. 그런 것들이 아직도 모여 있는 힘이 될 것.
하: 관계도 모호한 이야기. 빈집이 만들어진 관계가 어떤 거지.
**:빈집이 오른쪽 하단에 위치했는데 살면서는 D에서 확장된 가족형태인 A로 많이 갔다고 생각. 자유로운 삶 꿈꿔도 생활이 공유되면서 한집 안에서 일하듯 여기 와서 살고 나가서 다른 욕구 충족시키는 삶이 될 것. 집인데도 불구하고. 살면서 어느정도. A B C 구역들을 걸치게 되는식으로 이동. 그것이 가능해지고. 스스로는 확장된 가족형태로 이해. 마을도 확장된 가족형태가 그것의 순기능이 좋아서 그렇게 갈려고. 개개인의 힘으로 안되니까 정부에서 사업형태로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
하: 자유와 평등이 다른 걸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 D라고 본 것이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냥 그렇게 정해놓는 것. 운동이 되려면 D는 나름의 경전. D는 경전을 읽는 것. 환대는 계속 하는데 알콜중독자 장애인 어떻게 환대하나. 하면 자신의 경전에 비친 것을 보니까 가능. 기도하는 공동체는 성격과 무관하게 오래가. D가 나름 있다. 끊임없이 D에 살아야 하는데 다른데 살고 있지 반성하니까. 그런 과정에 없으면 이것도 스트레스. 각자 트릴지 않나 D에 대해서.
지: 고진 이야기가 그거다. 국가와 민족 자본이 다른 것 같지만 서로 의존. 어떤 것 묶으려면 다른 것 늘어나고. 극복하 f방안이 필요한데 D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 아닐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존겨ㅛ적인 것일 수도.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하는데 모든 사람과 다 해야 한다는게 기독교 윤리. 그런 형태. 빈집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이 아닐까. 빈집이 뭐냐 계속 싸웠는데 그럴 필요 없다. 각각 입장 있고. 그것 인정한 상태에서.
**: 내가 생각하는 빈마을의 D는 누구나 올수 있다는 것. 빈집의 현관문 같은 것. 현관문 넘어 오면 ABC 다 될 수 있는데. 공동의 목표 만드는 것 자체가 D를 막는 것. 합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경계에서 줄타기. 지금은 그 실험들 많이 했다고 본다면. 지금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선권: 아까 확장된 가족이라고 했는데.. 밖에서 보기에 빈집은 확장된 형태 가족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는 맞다. 기존 가족이 사랑 독점하고 안에서는 공유하지만 외부로는 하나도 공유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가족 틀 있는데 처음에는 협동조합 나중에는 마을이지만 섬처럼 고립. 성미산 보면 내 주변에 학교 다니는 학부모 있다. 몇 번에 걸쳐 인터뷰 하고 돈도 굉장히 벌어. 하지만 그 사람 이야기 들으면서 경제적 수준의 문제 아니고 문화자본이구나. 그게 아니면 진입 못하는. 성산 1동 주민들과 또다른 공동체. 그런 의미에서 그곳은 확장된 가족. 하지만 빈집은 아니다. 누구나 올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우리가 아는 테두리 넘어서기에 빈집이 흩어져 있음에도 지금까지 올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 두 가지 이야기가 다른 건데.
**:확장된 가족이 아니고 유사 가족으로 말 바꾸고 싶다. 가족이 가족 이기주의 안의 가족이 아니라 빈집 안에서는 나 하나가 개인 가죡. 꼬뮨들의 꼬뮨처럼. 각각의 개인들이 모여서 생활 공유하게 되는 과정이 기존에 있었던 친 부모 형제wkaodhk 나눴던 것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못했던 것 하니까 가족형태라고 부르는 것.
선권: 빈집이 그래서 확장하기 힘든 조건에 놓여 있다고 생각. 기존 가족주의적인 감성 자극하지 못한다고 생각. 오히려 마을 공동체는 들어가면 기존 가족관계에서 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감정적으로도 그렇지만 육아해결 등 필수적인 것 해결. 빈집은 그것이 안돼. 삶에 필연적인 욕구 맞닿아 있는게 아니라. 자유로운 인적 결사체의 느낌. 여기서 더 못 나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하승우 선생이 고미숙 선생 책 리뷰하면서.. 생각대로 생각하고 내가 알고 실천해서 살 수 있는 이들을 위한 공동체가 돼서는 안된다. 생각해도 못사는 사람 위한 공동체가 돼야.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런 마을 들이 전자인데 빈집은 그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태로 보인다.
하:그게 될려면 이야기한대로 내부에 필요한 것 내부에서 해결해야. 그런 마을 공동체가 쉬울까. 일부 생활에 필요한 것 공유하는 것.
선권: 자치 이야기했는데 자립의 문제. 한명의 활동가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정체성 유지하고. 그것을 유지하면서 재생산의 구조 만들 수 있을까. 자립경제 공동체. 크게 돈 안벌어도 자족적 형태만 되더라도. 현재 사회체계에서 가능할까. 확장하지 않고. 자금을 축적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할까. 그것을 모르겠다. 사업의 영역에 뛰어들어 넓혀야 하는 건가. 밖에서 보면 개인적인 딜레마고. 어떤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마무리..
하: 나는 빈집을 보고 좋아했던 것이 아나키즘이 아닐까. 밖에서 이야기하면 사례를 이야기해달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빈집을 사례로 접근. 관심이었는데. 아나키즘은 형체가 없는. D에. 여기는 D가 있으면 안된다고 보고 자기 속에 각각 근거가 있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사상 복원하는 곳. 근대적인 곳으로 등장했지만 비근대적인 곳. 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이 없었는데 그렇게 주장했던 것 중에 아나키즘. 그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은 아나키증. 운동이라고 봐.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조직이 있고 한데. 아나키즘이 생각한 운동은 자기 속의 에너지 끌어내는 것. dnflrk 알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과거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 방식으로 아나키즘을 뉴 아나키스트라고 하는데. 아나키즘은 회복의 사상이라고 생각. 가지고 있던 것 복원해 내는 사상이라고 생각. 운동도 새로운 사상으로 사람을 계몽시키는 것 아니고 그것이 다양해질 수 밖에 없는 거고 인정할 수 없는 거고 어떤 형태 체계wkf짤 건가. 체계를 자는 것이 억압적인 듯 하지만. 체계 짜는 것은 자유로운 행위. 자유롭지 않으면 계약 못해. 노예들끼리 계약 아닌 자유민들끼리 계약. 계약 속에 자신의 자유가 들어가. 자유롭기 위해 타자와의 관계 맺는 것이 중요. 아무리 자유로운 상황이라도 자기가 모르는 범주 내에 못하니까 쪼개면 된다고 생각. 작은 공동체만이 아나키즘이 아니라고 생각. 작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고 아주 커더라도 그 시스템이 사람들 속에 있는 에너지를 반영할 수 있는 구조인가. 원리가 사람에게 분리 아노디고 올라갈 수 있는가. 공동체에서 1세대가 만든 공동체는 2세대가 싫어해. 모여서 뭐하는 것 싫어해. 다른 데로 갈 자유가 있어야. 나가서 마음대로 살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중간지와 다른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 그래야만 근본적 자기 결정 가능. 몯msrjt 자기가 결정해야 되는게 아니고 다른 공동체 가질 수 있도록 하는게 중요. 아나키즘은 연합해서 뭔가를 대체하는게 아니고 연합해야만 자기를 반영한 삶이 실험될 수 있어. 다른 공동체들과 관계 어떻게 맺을 거냐. 환대도 비슷하다고 생각. 환대는 다가서기도 하는 부분이 있고. 내 자유라고 하는 것. 최근에 본 아나키즘 연방의 원리라는 책을 봤는데 연방은 내 자유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내가 다른 공동체 유지될 수 있도록 주는 것이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라 똑같은 상황에서 동등하게 받는 것. 그것이 연방의 원리. 큰 공동체가 작은 공동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큰 공동체가 작은 공동체 돕는 것이 시혜 아닌 지원. 그런 구조가 가능할 때 연방. 요즘은 공동체 싫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사라미끼리 공동체라는 것은 힘든 사람들은 죽겠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들이 중요하고 공동체 운동이 필요하고. 나는 아나키즘이 한국에서 db의algk다sms 것은 그런 고민 어떻게 엮을 건가. 복지국가 세금 많이 걷어야 한다고 하는데. 성장 시스템 기반 위해. 시혜적으로 서비스 전제하는 상황에서 오는 문제인데. 아나키즘은 세금을 왜 우리가 내야 하지부터 시작하는 것. 빈집 보면서 그런 가능성들을 고민. 나는 밖에 있는 입장이라서 그랬던 것. 온 사람들에게 죄송하지만 빈집의 길을 묻는데 나는 답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고. 오늘 한 이야기로 안되고. 같이 고민할 문제로서 안고 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