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로서의 공부
오늘 열한시 책읽기에서 <꼬뮨주의 선언>을 함께 읽던 중, 저와 체는 책을 함께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칼슈미트의 "적대적 정치"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에서의 한 구절(p.82)
"즉 국가 간 적대에서 국민의 일부가 어떠한 적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사태에 따라서는 적에게 가담하고 저을 돕는 행위이다"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난 이 구절이 병역거부자에게 가해지는 비난(이적행위라는)과 공격행위가 바로 칼 슈미트가 설명하는 정치의 적실한 예라는 뜻으로 손으로 가리키며 체에게 '병역거부'라고 작게 말했다. 체는 그 구절을 한참 응시하며 생각하더니 뭔가 알았다는 눈빛으로 연필을 찾아 밑줄을 긋고는 "병역거부"라고 적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와 체가 어떤 부분을 공유했다고 느꼈으며 내가 책읽기, 즉 공부집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하나의 강력한 이유가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정의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어떤 공부는 즐거워서 하고 또 어떤 공부는 필요해서 한다. 아마도 공부집에서 내가 기대했던 공부는 둘 다였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며 많은 것을 공유한다. 과연 우리가 공유해야 할 것은 세탁기나 냉장고 뿐일까. 정신적인 공유가 나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어떤 가치관과 생각들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했고 일정 부분은 공유하고 공감해야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함께 사는 것이 많은 경우 우리의 선택이고 각 개인이 어떤 목표와 뜻을 갖고 함께 산다는 불편함을 감수하는지 알 수 있어야 했다. 그 수단으로서 난 텍스트를 통한 대화를 선호한다.
책은 나에게 나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편한 수단이었다. 책을 통해 나는 많은 친구를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생각들을 형성하거나 발견했으며 부단히 나의 전제들을 의심해 보며, 깨트리기도 했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수용하는 것이고 그것은 나를 일정부분 깨트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내게 있어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나를 깨트리는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더불어, 책을 읽는 것은 내게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가까운 곳에서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함께할 친구를 얻는 것은 공부집을 만들면서 내가 기대했던 부수적 효과였다. 그것이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이지 조건은 아니니까.
나는 빈집에 녹색평론을 읽고 들어와서 책읽기를 통해 친해졌다. 내게 있어 빈집은 반자본주의적, 생태주의적 (꼬뮨이라는 말도 쓰고 싶지만 아직 무슨뜻인지 잘 모른다), 그리고 반성폭력적이고 평등한 상호부조 공동체로서 가치를 지닌다. 완벽하진 않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사회적 압력에 너무 많이 꺾지 않고 삶을 유지해나가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보금자리다. 이런 생각들을 공유해보고자 내가 북마스터일때는 녹색평론선집을 함께 읽으며 토론하기도 했었다(잘 되지는 않았지만) 물론 내가 쭉 써놓은 화려한 말들이 나는 무슨뜻인지 모른다. 이 허세들의 내용을 스스로 찾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기대와 바람을 갖고 함께 살고 있는지 묻기 위하여 그 방법중 하나로서 나는 공부를 계속해서 제안하고 싶은 생각이다.
p.s. 이 글은 공부집의 11월 글쓰기 주제에 따라서 쓴 글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p.s 급하게 다듬지 않고 밤에 쓴 글이라 격해요.
p.s. 이 글은 '절대로' 체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ㅋ
난 꼬뮨이라는 말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실 무슨 뜻인지도 잘-_-;;; 지난 토요일에는 사회보느라 고생 많았어요. 훌륭한 사회였음! - ㅎ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