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달군이랑 저랑 시장에 가는 길에 커피볶는 가게에 들러 커피도 얻어마시고
뭘 살까 논의하면서 눈길을 조심조심 걸어 갔지요.
웰빙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배달을 시키고
아랫집에 돌아와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시작하면서 넷빈집 식구 누구 안 오는지 물어보려
승현에게 전화하니 용산에서 일하고 있다 했고,
제프 오늘 일 안한다고 해서 제프에게 전화했더니 일하던 중이라고 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네오에게 전화했는데,
네오도 일하던 중이라고 해서 저녁밥 먹으러 오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어요.
이대가 함께 하려 와서 냉이를 씻어달라 하고
달군에게 가지요리를 해달라 하고
나는 뭘했드라... 냉장고를 열어 오랫동안 조리되지 않은 식재료들을 다 꺼냈어요.
송구영신 파티 때 사둔 식재료 중
잘 다듬어진 각종 버섯들이 락앤락통에 그대로 있었고
양배추도 그대로 있고
불려놓은 고사리도 몇 일째 퉁퉁 불어있었어요.
좀 속이 상했어요.
아, 이것들- 제 때 요리되면 좋았을 것을.
고사리 불려놓은 것을 깜빡 했었는데, 그나마 이렇게라도 내가 수습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도 했지요.
콩나물무침 한 통과 우엉조림 한 통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아랫집 사람들이 집에서 식사하는 일이 드물구나- 하고 추측도 했었지요.
물을 끓여 양배추를 삶아 건지고 그 물에 냉이를 넣어 건지고
이대는 감자를 씻어 반달썰기를 하고
막 합류한 가을이 양파를 다듬어 썰고
달군은 가지찜은 해본 적이 없다며 식초 들어간 가지요리를 하고 싶어하는 듯했는데 결국 가지찜을 하기로 하고
그 와중에 디온은 고사리를 요리하다 국간장을 너무 많이 넣어 짜게 되었어요.
그때쯤 나무가 나타나서
나는 봄동을 씻어 아기 손바닥만한 사이즈로 잘라달라고 말했어요.
나무는 봄동을 잘라서 씻어야 하는지, 씻은 후 잘라야하는지 물었지요.
나는 씻어서 자르는 것이 흙도 덜 묻고 물도 절약하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때쯤 나는 지쳐서 쉬고 싶어졌어요.
라브가 주방에 들어서서 봄동을 무쳤어요.
아,
대대적인 공사를 하는 것 같은 북적임.
사실 북적이는 것도 좋지만 좀 차분히 요리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도 같아요.
나는 언제부턴가 사람들에게 이것 이렇게, 저것 저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던 것이
조금씩 명령하듯 된 게 아닌가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자리를 피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반찬팀을 안하려고 빼는 듯한 태도가 있다면 다 그래서랍니다.
요리도 너무 빡세지 않게, 조용히 몇 사람이 소박하게 그렇게 하면 좋은데...
그건 엄청난 경지인 듯.
하여간 이렇게 저렇게 불편한 식탁을 차리고 말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싱글벙글 웃는 것도 같고
장난도 치고 즐거워보이는데
내가 무친 고사리는 짜고, 한솥 가득 한 채식육계장은 전혀 육계장스럽지 않았죠.
미안했어요.
그러다가 밥상 앞에서 이대가 고사리 이야기를 다시 꺼냈을 때 버럭했어요.
사실 별 일 아니라 생각했고 별 느낌도 없는 듯 했는데
하필 그때 그만 욱하고 뭔가 올라와버렸네요.
화도 내고. 손가락질도 하고. 참...
이대 미안해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화내서 미안합니다.
차분하게 화내지 않고 불편함을 말하지 못한 저 자신에게 너무 속상했지만
어쩌지를 못했네요.
그럼에도 이대, 끝까지 감자와 양파 통에 담아 정리하는 것까지 함께 해서
고맙고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준비해서 다양한 요리들이 상에 올랐어요.
푹 많이 배부르게 먹고 쉬니 당근 기쁜 상차림이었어야 했는데
마음이 내내 찌뿌듯해 잠이 잘 오지 않네요.
아마 제가 참여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런 일들이 또 있었겠지요.
상을 잘 차려 기쁘게 먹고 건강해지는 것도
정말로 큰 공부거리인 듯.
하여간
그래서 몇 가지 깨달음이 있었어요.
일단, 반찬을 시작하기 전에
장을 보러 가기 전에
아랫집 냉장고와 주방 상황을 먼저 체크했으면
오날날의 비극은 예방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
일단 고사리를 오바해서 무치지 않아도 됐다면,
혹은 다른 재료를 덜 사서 요리를 덜 했다면 좋았겠지요. 저의 불찰이었어요.
두 번째는,
반찬팀 멤버를 좀더 안정적으로 운영하면 좋겠다는 것.
그때 그때 시간 되는 분들이 함께 도와주면 좋지만,
약속된 멤버들이 일단 자리에 모여주면
어디서 무엇을 살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 결정하고 안정적으로 음식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기억엔 집마다 1명 이상은 반찬만들기에 참석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반찬팀은 필수팀 맞지요?)
이건 팀원들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집에서도 신경써서 파견해주면 좋을 듯.
필요하다면 요일을 새로 조정해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이게 어느 정도 되어야
실제로 다양한 부대효과(?)들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못오면 대타를 구해서 보내주거나 미리 연락을 주면 사람을 따로 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게 안되면, 반찬'팀' 제도에 대해서 좀더 보완을 해야할 것 같다능.
그리고 다음에 제가 반찬팀을 하게 되면
좀더 민주적인(?) 주방을 만들기 위해
저는 보조 역할을 주로 담당하는 쪽으로 했으면.. ㅎㅎ
밥상을 준비할 때, 몸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언제나 함께 움직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저 자신도 노력할게요.
아, 이제 넘 졸리다.
자야지.
뭐라 할 말 없다는, 맛난 저녁을 먹었다라는 것밖엔 별 기억이 없다는...
_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