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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야 아침부터 수기를 쓰는지각생.역시 명불허전이다
빈집은 하나의 미디어이다.
빈집이라는 공간을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며, 수많은 이야기들, 철학과 감정, 메시지들이 또한 거쳐간다.
한 공간에 오래 있으면 자연히 여러 사람, 동물과 곤충, 식물과 (귀신도?)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고,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공간 중에서도 빈집은 가장 핫한 미디어중의 하나일것이다.
나는 빈집을 통해 다양한 외국 사람들을 만나 문화의 단편을 접하고, 여러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관점을 접한다. 다양한 말투와 생활습관을 접하고, 다양한 직업(백수포함)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듣는다.
이 모든것은 대부분 완벽히 실시간 쌍방향으로 이뤄진다. 티비처럼 가만히 앉아 지켜보다 쌓인것을 인터넷 게시판에 뒤늦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생활보조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술을 먹이기도 하는, 참여자이며 기획자, 연출자, 진행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완벽히 생생한 미디어인 대신, 녹화했다가 다시 보는게 잘안된다는 점이다. 사진과 수기, 짧은 단편영상등은 있을지언정 전체를 충분히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손님은 그 자체로 중요한 미디어이다. 한손님이 빈집에 찾아오기전까지 그의 짧으면 십여년, 많으면 오십여년에 이르는 "축적되고 가공된 메시지"들이 그를 통해 흘러넘친다. 그런면에서 빈집은 미디어의 미디어이다. 충분히 주파수를 유연하게 맞출 수 있고, 그들의 출력을 받아안을 에너지가 있는한, 빈집은 그야말로 메시지의 보고.
심지어 빈집의 벽, 귀퉁이도 미디어이다. 셜록홈즈같은 관찰력과 추리력이 있는 사람이 빈집을 찾아온다면 어느 한쪽 벽, 귀퉁이,부엌,옥상 등을 바라보며 발견할 것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스쳐갔음을, 사람들의 흔적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음을, 얼마나 많은 변천사를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원망,욕망이 이곳에 있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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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미지 속에서 빈집의 프롤로그는, 지음 살구 달군과 자전거로 대추리를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곳엔 디온이 차를 기르고 있었고 (뭔가 포스가.. ㄷㄷㄷ) 함께 차를 마시며 공동주거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물론 나는 거의 듣기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평소에 그런 고민을 별로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 그런 것이 가능하겠군, 좋은데? 추임새를 넣는 것이 전부.
그 후 몇년간 각자 재미나게, 충실하게 살다가 지음 살구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데반과 함께 아랫집을 열었다. 내 이미지 속 본편의 첫장면은 아랫집 첫날밤. 그날도 늦게 아랫집에 놀러 왔는데, 그때 아랫집 마루에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한쪽 쇼파에는 아주 평범해보이는, 나이도 지긋해보이는 분들이 대체로 조용히 앉아계시고, 그 앞엔 탁자와 음식이 있다. 그곳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내게는 익숙하나 객관적으로는 별로 평범해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 "친구"들이 따로 모여 놀고 있다. 아.. 저분들은 분명 지음 아니면 살구 가족이겠구나! 혹시 당황하고 계신 건 아닐까? 내 자식의 새 집에 기쁘고 설렌 마음으로 다 같이 놀러 왔는데.. 대체 이 손님들의 면면은 참으로.. 괴이하구나. 여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나는 이미 반은 정신나간 듯해 보이는 친구들은 그냥 놀게 내버려두고 탁자 앞에 다가가 음식을 집어먹으며 그 "가족"분들에게 말을 건넸다. 아.. 이 어색함, 사전 정보의 부족, 주변 상황의 당혹스러움.
그리고 한 달이 조금 더 지나서 나도 빈집에 들어와 살게 됐다. 나랑 잘 알던 성재씨가 (빈집송 작곡자) 나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솔직히 살짝 걱정했었는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놀랐다. 데반과 살구, 지음과는 거의 맨날 술을 마셔댔다. 평소에 얘기가 통하고 뜻이 맞는 것과 다르게 같이 살다보니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자잘한 트러블도 생긴다. (어떤 트러블의 장면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첫 갈등" 상황과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이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뒤끝이 아니라고!)
솔직히 첫해의 장면들이 벌써부터 뿌옇다. 되게 짧게 짧게 이미지가 떠오르고 잘 연결되지 않으며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그나마 여러 장면들이 계속 떠오르긴 하는데, 내가 빈집 X돌 잔치를 할때마다 사진 슬라이드 영상을 만든 덕이다. 빈집 사진, 손님 사진, 같이 놀러간 사진들은 각자 많이 찍었지만, 그 사진들을 가장 많이 "돌려 본" 사람은 아마 단연코 내가 아닐까. 최초의 "빈집 덕후" 지각생.
기억은 약해지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힘들다. 사진이 있으면 그 기억을 끌어올리고 묘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한동안은 사진을 열심히 찍었던 것 같다. 블로그를 안쓰고 대체로 글 쓰기 자체를 안하게 되면서 사진도 잘 안찍게 됐지만, 그렇게 일년을 보낸 다음에 사진 슬라이드 영상을 만들려고 하면 그 빈약함이 너무나 안타깝다. 더 많은 좋은 장면들, 기억들이 있는데 사진으로,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이 많다. 말로, 글로 전달되기에는 그 입체적인 느낌이 다 사라져버리고..
장면들을 몇 가지 더 꼽으려 했는데 시간이 없고(오늘 일정이.. 내가 늦게 써놓고 시간타령을 하려니..-_-), 사실 무엇보다 내 기억의 표면 위에 떠오를 것 같던 장면들,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 내 의식 수면위에서 찰랑찰랑거리던, 방금전까지 생생하게 기억..했을 것 같던 장면들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있다. 언제나 기억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말한 것, 지금이라도 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이 말하지 못한,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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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원 빈집
시간을 멈췄을때 이 현실 세계가 3차원 공간이라면, 시간이 흐르고 있고 앞 뒤로 영향을 받는 지금은 4차원이다. 빈집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것들이 중첩되고 있다. 어떤 것은 비슷하게 반복되고, 어떤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것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할 모습이다. 지난 4년간의 모습의 총체가 모두 빈집이다.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지난 4년간 수없이 겹치는 모습들, 예를 들어 아랫집 마루에서 한 활동들 - 술 빚기, 초 만들기, 닷닷닷, 술자리, 회의, 낮잠, 식사, 노래와 연주, 독서, 김장 담그기, 게임과 퍼즐 맞추기, 요리, 말다툼과 울음, 밤잠, 고양이 강아지와 놀기 그 모든 것이 없이는 지금의 이 상황이 없을테니까.
빈집에 CCTV가 있다면 큰일날 소리겠지만, 가상의 CCTV를 통해 하루 24시간, 일년 열두달, 그리고 4년 한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특정한 누군가를 관찰,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사람, 어떤 것들이 다녀가고 계속 변하는지를 본다. 저 책꽂이는 이쪽에 있다가 사람들이 낑낑대며 이쪽으로 옮기고, 다시 저쪽으로 옮겨간다. 한쪽에 있던 쇼파는 이 사람, 저 사람 앉고, 잠자고, 고양이가 손톱을 긁어 깎는다. 점차 더러워지고 닳아 없어지는, 그러다 결국 없어진 쇼파의 자리는 다른 물건이 자리한다. 작은 테이블과 컴퓨터가 있다가, 침대가 들어온다. 그 침대는 2층이었다가 1층으로 되고, 다시 다른 구석으로 간다. 침대는 원래가 부실했는지 붕괴되고 만화책이 받친다. 저 만화책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고, 수 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게 웃기고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착상을 일으켰던 것인데, 이제는 조용히 다른 물건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아랫집 마루의 저 귀퉁이는 많은 것들이 공존한다. 현재의 한 물건 혹은 사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 감정으로. 그리고 아랫집 마루의 중앙은.. 정말 수 많은 사람들.. 사람들.. 음파, 빛, 열기, 향기.. 등으로 가득하다. 특정한 순간엔 비어 있을지 모르나 이미 오랫동안 많은 것들이 거기를 꽉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3차원을 살지 않는다고 한다. 2.5에서 2.7차원 정도를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 말이 합당하냐 아니냐를 떠나 저 개념을 차용해보기로 한다. 우리가 특정 시점에서 어떤 공간을 참으로 알차게 잘 사용한다면 "꽉 찬 3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테지. 그것이 오랫 동안 지속될 수 있게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해 잘 이어나간다면 "꽉 찬 4차원"의 삶을 사는 것일테지. 그럼 우리의 지금 삶은 몇차원쯤 될까? 3.5? 3.2? 아니 어쩌면 과거의 기억을 잊거나, 거쳐간 사람들의 노력, 메시지가 지금 사는 사람들과 소통되지 않아서 과거와 단절되어 있다면 숫자는 더 떨어질 것이다. 미래를 충분히 다양하게 그리고 만들어가는 "현재"를 살지 않는다면 "꽉 찬 4차원"과는 더 멀 것이다. 지금 이때 한순간 한순간 이 공간을 유지하는게 힘들다면 사실 "꽉 찬 3차원"도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역시 노력해오기는 했지만 언제부턴가 서서히 그 준위가 떨어져가며 "그나마 3차원"마저 위협받고 있는 건 아닐까. 빈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결국 극복하려던 "2.X"차원대의 현실 세계에서, 사실 우리는 기껏해야 0.X차원정도 더 나아간게 아닐지 모른다.
"저 사람은 4차원이다"고 하면 한국에서는 뭔가 특이하고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의미이지만, 빈집은 그런 4차원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4차원의 공간인 것 같다. 그러니, 모두 자신의 4차원적인 에너지, 감성들을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풀어놓아도 될 것 같아. 지난 4년간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노력, 말로 전해진 것과 그렇지 못한것, 시도해서 성과를 거둔 것, 중단된 것, 아예 시도조차 못한 것, 그런 것들 중에 일부는 앞으로 다시 반복될 것이다. 빈집이란 것이 앞으로도 있다면 말이지. 손님의 감성으로 산다는 것은, 주인같은 마음으로 머문다는 것은 이런 4차원 세계 - 빈집의 어느 한 순간 한 장면의 주인공이라는, 중요하지만 역시 흘러갈 거라는 "적당한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테다. 갑자기 교훈조가 되니까 사람들이 지루해 할 것이 떠오른다. 미안하다. -_-
4차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만들어가는 "비전"이 필요하다. 그 비전은 다양한 높이를 가지고 있고(땅에서 보는 하늘), 다양한 방향을 가지고 있다. (지구에서 보는 우주) 빈집의 모든 손님들은 저마다의 높이와 방향을 가진 비전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그 비전을 스스로 충분히 생생하게 인식하든 아니든,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던 아니든, 현실화를 잘 할 수 있던 아니든.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오래 머물고, 다양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빈집이란 공간을, 아니 4차원 세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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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서 나와 있은지 벌써 꽤 됐다. 빈집 미디어를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내 얘기도 했다. 그 입체적인, 생생한 미디어에서 "일시 중지" 버튼을 눌렀는데, 다시 "재생"버튼을 누르려니 조금 망설여진다. 빈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TV를 보는 것과 다르다. 그 안에 녹아들어 간다. 난 이곳에 있고 다른 사람들과 "완벽히 안전한" 거리를 두고 "귀찮음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처 주고, 받지 않고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빈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흥미롭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손을 대는 순간 그 뜨거움, 여러 욕망들, 감정들과 하나가 된다. 나는 한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일 수 없고, 한 세계에 몰입하면서 다른 세계에도 몰입할 수 없다. 난 지금 빈집이 아닌 다른 세계에 몰입해 있고 (공동체/비영리IT 운동), 언젠가 다시 즐겁게 빈집에 다시 몰입할 수 있을 때까지 빈집이 계속 "변화하며 유지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흥, 어떻게 될까? ㅋ
빈집은 하나의 미디어이다.
빈집이라는 공간을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며, 수많은 이야기들, 철학과 감정, 메시지들이 또한 거쳐간다.
한 공간에 오래 있으면 자연히 여러 사람, 동물과 곤충, 식물과 (귀신도?)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고,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공간 중에서도 빈집은 가장 핫한 미디어중의 하나일것이다.
나는 빈집을 통해 다양한 외국 사람들을 만나 문화의 단편을 접하고, 여러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관점을 접한다. 다양한 말투와 생활습관을 접하고, 다양한 직업(백수포함)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듣는다.
이 모든것은 대부분 완벽히 실시간 쌍방향으로 이뤄진다. 티비처럼 가만히 앉아 지켜보다 쌓인것을 인터넷 게시판에 뒤늦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생활보조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술을 먹이기도 하는, 참여자이며 기획자, 연출자, 진행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완벽히 생생한 미디어인 대신, 녹화했다가 다시 보는게 잘안된다는 점이다. 사진과 수기, 짧은 단편영상등은 있을지언정 전체를 충분히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손님은 그 자체로 중요한 미디어이다. 한손님이 빈집에 찾아오기전까지 그의 짧으면 십여년, 많으면 오십여년에 이르는 "축적되고 가공된 메시지"들이 그를 통해 흘러넘친다. 그런면에서 빈집은 미디어의 미디어이다. 충분히 주파수를 유연하게 맞출 수 있고, 그들의 출력을 받아안을 에너지가 있는한, 빈집은 그야말로 메시지의 보고.
심지어 빈집의 벽, 귀퉁이도 미디어이다. 셜록홈즈같은 관찰력과 추리력이 있는 사람이 빈집을 찾아온다면 어느 한쪽 벽, 귀퉁이,부엌,옥상 등을 바라보며 발견할 것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스쳐갔음을, 사람들의 흔적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음을, 얼마나 많은 변천사를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원망,욕망이 이곳에 있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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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미지 속에서 빈집의 프롤로그는, 지음 살구 달군과 자전거로 대추리를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곳엔 디온이 차를 기르고 있었고 (뭔가 포스가.. ㄷㄷㄷ) 함께 차를 마시며 공동주거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물론 나는 거의 듣기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평소에 그런 고민을 별로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 그런 것이 가능하겠군, 좋은데? 추임새를 넣는 것이 전부.
그 후 몇년간 각자 재미나게, 충실하게 살다가 지음 살구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데반과 함께 아랫집을 열었다. 내 이미지 속 본편의 첫장면은 아랫집 첫날밤. 그날도 늦게 아랫집에 놀러 왔는데, 그때 아랫집 마루에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한쪽 쇼파에는 아주 평범해보이는, 나이도 지긋해보이는 분들이 대체로 조용히 앉아계시고, 그 앞엔 탁자와 음식이 있다. 그곳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내게는 익숙하나 객관적으로는 별로 평범해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 "친구"들이 따로 모여 놀고 있다. 아.. 저분들은 분명 지음 아니면 살구 가족이겠구나! 혹시 당황하고 계신 건 아닐까? 내 자식의 새 집에 기쁘고 설렌 마음으로 다 같이 놀러 왔는데.. 대체 이 손님들의 면면은 참으로.. 괴이하구나. 여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나는 이미 반은 정신나간 듯해 보이는 친구들은 그냥 놀게 내버려두고 탁자 앞에 다가가 음식을 집어먹으며 그 "가족"분들에게 말을 건넸다. 아.. 이 어색함, 사전 정보의 부족, 주변 상황의 당혹스러움.
그리고 한 달이 조금 더 지나서 나도 빈집에 들어와 살게 됐다. 나랑 잘 알던 성재씨가 (빈집송 작곡자) 나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솔직히 살짝 걱정했었는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놀랐다. 데반과 살구, 지음과는 거의 맨날 술을 마셔댔다. 평소에 얘기가 통하고 뜻이 맞는 것과 다르게 같이 살다보니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자잘한 트러블도 생긴다. (어떤 트러블의 장면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첫 갈등" 상황과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이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뒤끝이 아니라고!)
솔직히 첫해의 장면들이 벌써부터 뿌옇다. 되게 짧게 짧게 이미지가 떠오르고 잘 연결되지 않으며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그나마 여러 장면들이 계속 떠오르긴 하는데, 내가 빈집 X돌 잔치를 할때마다 사진 슬라이드 영상을 만든 덕이다. 빈집 사진, 손님 사진, 같이 놀러간 사진들은 각자 많이 찍었지만, 그 사진들을 가장 많이 "돌려 본" 사람은 아마 단연코 내가 아닐까. 최초의 "빈집 덕후" 지각생.
기억은 약해지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힘들다. 사진이 있으면 그 기억을 끌어올리고 묘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한동안은 사진을 열심히 찍었던 것 같다. 블로그를 안쓰고 대체로 글 쓰기 자체를 안하게 되면서 사진도 잘 안찍게 됐지만, 그렇게 일년을 보낸 다음에 사진 슬라이드 영상을 만들려고 하면 그 빈약함이 너무나 안타깝다. 더 많은 좋은 장면들, 기억들이 있는데 사진으로,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이 많다. 말로, 글로 전달되기에는 그 입체적인 느낌이 다 사라져버리고..
장면들을 몇 가지 더 꼽으려 했는데 시간이 없고(오늘 일정이.. 내가 늦게 써놓고 시간타령을 하려니..-_-), 사실 무엇보다 내 기억의 표면 위에 떠오를 것 같던 장면들,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 내 의식 수면위에서 찰랑찰랑거리던, 방금전까지 생생하게 기억..했을 것 같던 장면들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있다. 언제나 기억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말한 것, 지금이라도 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이 말하지 못한,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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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원 빈집
시간을 멈췄을때 이 현실 세계가 3차원 공간이라면, 시간이 흐르고 있고 앞 뒤로 영향을 받는 지금은 4차원이다. 빈집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것들이 중첩되고 있다. 어떤 것은 비슷하게 반복되고, 어떤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것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할 모습이다. 지난 4년간의 모습의 총체가 모두 빈집이다.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지난 4년간 수없이 겹치는 모습들, 예를 들어 아랫집 마루에서 한 활동들 - 술 빚기, 초 만들기, 닷닷닷, 술자리, 회의, 낮잠, 식사, 노래와 연주, 독서, 김장 담그기, 게임과 퍼즐 맞추기, 요리, 말다툼과 울음, 밤잠, 고양이 강아지와 놀기 그 모든 것이 없이는 지금의 이 상황이 없을테니까.
빈집에 CCTV가 있다면 큰일날 소리겠지만, 가상의 CCTV를 통해 하루 24시간, 일년 열두달, 그리고 4년 한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특정한 누군가를 관찰,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사람, 어떤 것들이 다녀가고 계속 변하는지를 본다. 저 책꽂이는 이쪽에 있다가 사람들이 낑낑대며 이쪽으로 옮기고, 다시 저쪽으로 옮겨간다. 한쪽에 있던 쇼파는 이 사람, 저 사람 앉고, 잠자고, 고양이가 손톱을 긁어 깎는다. 점차 더러워지고 닳아 없어지는, 그러다 결국 없어진 쇼파의 자리는 다른 물건이 자리한다. 작은 테이블과 컴퓨터가 있다가, 침대가 들어온다. 그 침대는 2층이었다가 1층으로 되고, 다시 다른 구석으로 간다. 침대는 원래가 부실했는지 붕괴되고 만화책이 받친다. 저 만화책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고, 수 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게 웃기고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착상을 일으켰던 것인데, 이제는 조용히 다른 물건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아랫집 마루의 저 귀퉁이는 많은 것들이 공존한다. 현재의 한 물건 혹은 사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 감정으로. 그리고 아랫집 마루의 중앙은.. 정말 수 많은 사람들.. 사람들.. 음파, 빛, 열기, 향기.. 등으로 가득하다. 특정한 순간엔 비어 있을지 모르나 이미 오랫동안 많은 것들이 거기를 꽉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3차원을 살지 않는다고 한다. 2.5에서 2.7차원 정도를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 말이 합당하냐 아니냐를 떠나 저 개념을 차용해보기로 한다. 우리가 특정 시점에서 어떤 공간을 참으로 알차게 잘 사용한다면 "꽉 찬 3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테지. 그것이 오랫 동안 지속될 수 있게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해 잘 이어나간다면 "꽉 찬 4차원"의 삶을 사는 것일테지. 그럼 우리의 지금 삶은 몇차원쯤 될까? 3.5? 3.2? 아니 어쩌면 과거의 기억을 잊거나, 거쳐간 사람들의 노력, 메시지가 지금 사는 사람들과 소통되지 않아서 과거와 단절되어 있다면 숫자는 더 떨어질 것이다. 미래를 충분히 다양하게 그리고 만들어가는 "현재"를 살지 않는다면 "꽉 찬 4차원"과는 더 멀 것이다. 지금 이때 한순간 한순간 이 공간을 유지하는게 힘들다면 사실 "꽉 찬 3차원"도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역시 노력해오기는 했지만 언제부턴가 서서히 그 준위가 떨어져가며 "그나마 3차원"마저 위협받고 있는 건 아닐까. 빈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결국 극복하려던 "2.X"차원대의 현실 세계에서, 사실 우리는 기껏해야 0.X차원정도 더 나아간게 아닐지 모른다.
"저 사람은 4차원이다"고 하면 한국에서는 뭔가 특이하고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의미이지만, 빈집은 그런 4차원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4차원의 공간인 것 같다. 그러니, 모두 자신의 4차원적인 에너지, 감성들을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풀어놓아도 될 것 같아. 지난 4년간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노력, 말로 전해진 것과 그렇지 못한것, 시도해서 성과를 거둔 것, 중단된 것, 아예 시도조차 못한 것, 그런 것들 중에 일부는 앞으로 다시 반복될 것이다. 빈집이란 것이 앞으로도 있다면 말이지. 손님의 감성으로 산다는 것은, 주인같은 마음으로 머문다는 것은 이런 4차원 세계 - 빈집의 어느 한 순간 한 장면의 주인공이라는, 중요하지만 역시 흘러갈 거라는 "적당한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테다. 갑자기 교훈조가 되니까 사람들이 지루해 할 것이 떠오른다. 미안하다. -_-
4차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만들어가는 "비전"이 필요하다. 그 비전은 다양한 높이를 가지고 있고(땅에서 보는 하늘), 다양한 방향을 가지고 있다. (지구에서 보는 우주) 빈집의 모든 손님들은 저마다의 높이와 방향을 가진 비전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그 비전을 스스로 충분히 생생하게 인식하든 아니든,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던 아니든, 현실화를 잘 할 수 있던 아니든.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오래 머물고, 다양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빈집이란 공간을, 아니 4차원 세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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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서 나와 있은지 벌써 꽤 됐다. 빈집 미디어를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내 얘기도 했다. 그 입체적인, 생생한 미디어에서 "일시 중지" 버튼을 눌렀는데, 다시 "재생"버튼을 누르려니 조금 망설여진다. 빈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TV를 보는 것과 다르다. 그 안에 녹아들어 간다. 난 이곳에 있고 다른 사람들과 "완벽히 안전한" 거리를 두고 "귀찮음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처 주고, 받지 않고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빈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흥미롭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손을 대는 순간 그 뜨거움, 여러 욕망들, 감정들과 하나가 된다. 나는 한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일 수 없고, 한 세계에 몰입하면서 다른 세계에도 몰입할 수 없다. 난 지금 빈집이 아닌 다른 세계에 몰입해 있고 (공동체/비영리IT 운동), 언젠가 다시 즐겁게 빈집에 다시 몰입할 수 있을 때까지 빈집이 계속 "변화하며 유지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흥, 어떻게 될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