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트위터
대형교회들, 무상급식 반대. 초기 기독교는 공산주의 사회였습니다. 온 재산을 교단에 헌납하고 모두 공유했죠. 그거 거부하고 재산 빼돌렸다가 벼락 맞아 죽기도 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얘기.... 하여튼 벼락 맞을 놈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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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콕스, <<종교의 미래>>
‘예수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내뱉은 일성(一聲)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신앙의 핵심이고 선포한 메시지의 정수(精髓)입니다. 로마제국의 통치이념과 질서, 가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그 나라를 이 땅위에 세워나가는데 대한 헌신을 요구한 예수의 삶과 목소리는 지난 1500년의 세월동안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의 중얼거림 속에서 잊혀졌습니다. 하비콕스는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 없이 하나님을 가지려고 하는 동안에, 세속주의자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 정의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예수를 가슴에 모시는 것은 불가피하게 결국 하나의 개인주의적 경건으로 흘러가 버린다>
하비 콕스, <<세속도시>>
1. 세속도시의 형태 - 도시사회 제도의 특징인 익명성과 이동성은 종종 비판받는다. 하지만 익명성과 이동성은 도시에서 인간 삶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도시인은 농촌공동체처럼 모든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사람만을 선택해서 친교를 맺는다. 콕스는 도시인에게 전통 사회의 친밀성과 공동체 정신을 회복시키려는 교회는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지적한다. 도시인은 익명성 속에서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 아니라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과 사귀면서도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교회는 종교, 인종, 이념,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는 세속도시에 걸맞은 기능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2. 세속도시의 양식 - 하비 콕스는 현대인에게서 실용주의와 불경성을 제거하려는 어떤 노력도 잘못된 것이며 실용주의와 불경성은 오히려 도시인으로 하여금 복음의 요소들을 깨닫게 해준다고 한다. 성서의 진리관과 창조관은 세속도시의 양식과 유사하다. 신학은 살아 있는 정신으로, 인간이 의존, 두려움, 종교성으로 후퇴하라고 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도시성과 세속성을 부르며, 이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문제를 창조자의 선물로 받아들일 것, 기술시대의 인간으로서 이 시대를 모든 이들이 살아갈 인간적 거처로 만들라고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콕스의 주장이다.
3. 세속도시와 교회 - 하비 콕스는 교회의 오류와 우상을 파괴하고 본래적인 복음의 회복을 주장하며, 교회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가난한 자의 권리를 찾는 데 힘쓸 것을 기대한다. 종교가 세속도시 안으로 들어와 바람직한 세속도시의 완성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3세계의 민중종교운동에 많은 기대를 한다. 도시 세속 생활에서 교회는 혁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널리 선포하고, 도시의 균열을 치료하고 봉사하며, 눈에 보이는 희망, 즉 인간의 도시를 만드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감벤, <<세속화예찬>>
종교란 사물, 장소, 동물, 사람을 공통의 사용에서 분리해내고, 그렇게 분리된 것을 천상이나 지상의 신들이 배타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들의 배타적 소유가 된 것을 고대인들은 ‘성스러운 것’ 혹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성스러운 것이나 종교적인 것은 신들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판매되거나 저당 잡힐 수도, 그 용익권을 양도하거나 지역권이 부과될 수도 없었다. 기존의 종교사학자들이나 법제사학자들이 ‘희생제의’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런 과정을 매개한다. 요컨대 종교는 일차적으로 인간과 신들을 분리하고, 그 다음으로 희생제의라는 의례를 통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리한다.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고대 로마법의 이런 재산권 개념을 그 안에 융합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환속화가 교회의 자산이 세속의 손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했던 이유가 이 때문인데, 아감벤이 말하는 성스러운 것의 법적인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아감벤이 왜 자본주의를 근대적 종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는 성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소비를 통해서만 대상과 사물(심지어 공기, 물, 공간, 시간까지)에 접촉할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고대 세계에서 이런 사용하기의 불가능성을 매개했던 것이 희생제의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적)소유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요컨대 소유란 희생제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로운 사용을 일종의 분리된 영역으로 옮기는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종교의 극단화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종교를 특징짓는 분리의 구조를 모든 영역에서 일반화·절대화하기 때문이다. 『세속화 예찬』의 자매편 격인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에서 아감벤은 ‘장치’(dispositio)의 어원이 그리스도교 교부들에 의해 재해석된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즉 가정의 관리·경영임을 보여줌으로써 경제의 신학적 기원을 언급한 바 있다. 『세속화 예찬』에서 아감벤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분리가 일반화·절대화된 과정을 ‘세계의 박물관화’라고 부른다. 우리는 오늘날 박물관 안의 유리진열장에 담겨 전시되는 것과 같은 형태로만 대상과 사물을 마주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속화가 도래할 세대의 정치적 과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대 사회에서 세속화가 성스럽나 종교적이었던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되돌리는 것이었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속화는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핵심 구조, 즉 장치-소비-(사적)소유로 이뤄진 분리 일체를 전복하는 전략이다. 요컨대 오늘날 인간이 공통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사물과 대상만이 아니다. 우리는 장치들이 포획해 상품화한 모든 것 ――― 인간의 언어능력, 섹슈얼리티,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교감과 소통의 능력, 즉 삶/생명의 잠재성 일체를 모두 되찾아와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종교적 권력은 언제든 인간을 다시 집어삼킬 것이다. 『세속화 예찬』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라..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