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를 만난 빈집

조회 수 1900 추천 수 0 2010.07.15 19:41:55

다람쥐회에서 다람쥐회 소식지에 빈집 소개글을 싣고 싶다고 해서 정리해 본 글입니다.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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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를 만난 빈집


지음(빈집 장기투숙객)


'빈집'은 서울의 한 복판, 남산의 남쪽 바로 아래 해방촌, 남산 2호 터널과 3호 터널을 지나는 찻길이 만나고 갈라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4층 건물의 4층집에서 시작했습니다. 2008년 02월 21일, 이 집에서는 '빈집들이'가 열렸습니다. 주인이 만들어 놓은 집에 손님을 맞이하는 '집들이'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집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두가 주인이 되어 이 집을 어떻게 만들어갈까를 얘기했던 잔치였습니다. '빈집'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 뒤로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사람과 동식물과 물건들이 오고가고 만나고 부딪히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웃에 빈집들도 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빈집에서는 여러 장기투숙자들이 모여 살며, 계속 새로운 주인들을 ‘들이’면서 이 집을 어떻게 만들어갈까 얘기합니다. 빈집은 아직도 여전히 항상 '빈집들이' 중인 셈입니다. 하루하루 각자가 바라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면서 빈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빈집을 잠시 머무르는 숙소로 살고,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귀농을 생각하며 잠시 머무르는 사람들과 지역에서 상경해서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온 10대에서부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온 50대도 있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살 수 없어 오는 사람들이지만, 앞으로도 쭉 가난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궁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가 와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빈집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빈집을 굳이 정의하고 소개한다면, 이 비어있고 변화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해진 주인과 정해진 이름이 없는 집.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집. 손님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손님이 되는 집.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환대하는 집. 함께 살면서 함께 살기를 배우는 집. 무엇이든 채우고 또 비울 수 있는 집. 하나의 이름에 고정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이름이 함께 있고, 그래서 더 많은 이름들이 생겨나고 있는 집이 빈집입니다.


빈집이 정말로 빈집이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도 누구나 주인이어야 하고,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누구나 집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그 비용은 가난한 사람도 누구나 부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약자와 출자자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을 제한해서, 각자가 내는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체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빈집에서는 출자한 돈에 대한 보상은 하지 않고, 다달이 발생한 경비를 자율적으로 나눠 내기만 하면 동등한 주인으로서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같이 살면서 자신이 가진 물건과 재능을 공유하듯이, 집에 필요한 경비와 집 보증금 역시도 공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천이 집 문턱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돈은 전월세계약이라는 법적 현실적 조건에 의해 제약받고 있었고, 자신의 보증금을 집문턱을 넘어서까지 공유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각자가 가진 돈의 크기도, 돈에 대한 인식도, 빈집에 머무르는 기간도 달랐습니다. 각 빈집들마다의 사정도 다 달랐습니다. 또 집 이외의 경제생활은 여전히 홀로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몇몇 빈집 투숙객들이 다람쥐회를 방문하고, 몇몇 다람쥐들이 빈집을 방문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즐겁고 강렬한 만남은 빈집에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습니다. ‘우주(宇宙)생활협동조합 빈고(Bin-go!)’. ‘주거생협’과 ‘빈마을금고’에서 비롯된 이 이름은 빈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의 경제 질서를 만들어가는 독특한 형태의 주거와 신용을 함께하는 일종의 협동조합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람쥐회를 만난 덕에 비로소 자신감과 희망을 갖고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람쥐회와 비슷한 점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람쥐에 대해서 재밌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아서 수십 곳에 저장해 두는데, 대부분의 장소를 기억하지 못해서 찾아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지도 못할 것을 모으는 다람쥐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람쥐가 모아둔 도토리는 숲의 다른 동물들이 소중한 양식이 되기도 하고, 싹이 터서 새 도토리나무로 자라나기도 합니다. 다람쥐야 말로 숲을 키우고 생명을 보듬는 숲의 경작자이자 살림꾼인 것입니다.


빈집도 다람쥐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진 돈의 가치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공유할 때 더욱 빛을 발하며, 미래를 살아갈 모든 사람들도 함께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빈집에서 살면서 돈을 적게 쓰고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오히려 돈을 적게 써야만 행복하고도 올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습니다. 그럴 때 돈은 우리를 옥죄고 억누르는 지금의 위치에서 내려와, 원래의 위치 즉 우리의 삶을 위한 단순하고 유용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다람쥐회의 오랜 역사와 결코 쉽지 않은 이 역사를 만들어오신 여러 다람쥐들에게 큰 존경과 감사와 우정을 보냅니다. 앞으로도 빈집과 다람쥐회를 서로 자주 오가며 함께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빈집과 빈집 홈페이지(http://www.binzib.net)를 방문해 주세요. 빈집은 늘 열려있고, 다람쥐들은 환대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


라브님

2010.07.15 23:32:45

마지막에 "여러 다람쥐들에게 큰 존경과 감사와 우정을 보냅니다." 이거 뭔가 거물급들이 축사 같은 거 할 때 자주 쓰는 클리쉐 같은 거 ㅋㅋㅋ (지음님은 거물)

 

나 고등학교 때 별명 중 하나가 다람쥐였는데......다람쥐가 머리는 나쁘지만 이타적인 생물이로구나~조쿠나

지음

2010.07.16 03:28:41

친애하는 라브님. 왜 이러십니까? ㅎㅎㅎ

사실은 머리가 엄청 좋은 걸지도 모르지. 다른 동물들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았다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위해서... 일부러 기억을 못하는 척하는 거지... ㅋㅋㅋ ㅋ

또... 이타적이라기 보다는 지혜롭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 듯. 왜냐하면... 자기가 땅속 깊이 묻은 도토리나 다른 동물들이 먹고 덜 소화된 채 배설되는 도토리는 발아해서 성장하기에 훨씬 좋은 환경이 될텐데... 이건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과 자신의 종족에게도 미래의 먹을 거리를 끊임없이 공급해줄테니까. 

오... 나 왠지 이러니까 생물학도 같잖아? ㅋㅋ

라브님

2010.07.16 20:44:56

의도하지 않은 지혜로움 마저......다람쥐야 너는 날 닮았구나~

 

오...생물학도 ㅋㅋㅋ 그 생물학도 타이틀은 맥주 팔 때를 위해 넣어둬 넣어둬. 대신 그때는 (미)를 붙여야지 ㅎㅎ

이발사

2010.07.16 04:56:14

아~! 그렇게 된거구나! 빈고~!

손님

2010.07.17 18:53:21

요즘 같이 일하는 샘이 내게 자꾸 다람쥐라 하시대잉. 여기 찌까 저기 찌까 꽁쳐놓고 잘 까묵는다꼬... ^^;; 부엌에서 종종 작품을 발견하기도. 헤헤~  -쥐손

손님

2010.07.17 18:54:50

아, 이 글을 탈고하느라 늦었구나~~ 그래도 "우리 애가 밥을 놓고 가서요..." 하며 아규 도시락 챙겨오는 센스쟁이! 우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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