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가사노동이란 언제나 엄마/아내의 몫이었고, 나는 그 깊은 세계를 알지도 못하는, 알지 않아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족' 내부에서 살고 있었던게다. 살림, 살리는 것, 살아가는 것을 자기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렇게 점점 무능력해지는 것, '착취'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렇게 길들어져 왔다. 다음으로 '자취'를 하면 어떤가? 길들여진 신체는 무엇하나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지지리 궁상 자취생의 집에서 모든 가사노동은 내일로 유예된다. 라면과 쓰레기로 점철된 자취의 이미지는 그렇게 만들어져왔다.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 시대, 가사노동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노동/공부의 일과시간이 강제되는 시스템의 탓도 있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자기─살림들을 돌볼 수 있는 여유란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 직장인은 살림하기 힘들다. 근데, 빈집에서는 이 명제가 뒤바뀐다. 함께 사니까, 언제나 끝이 없는 살림을 나누어서 하고, 내가 하지 않는 동안 다른 사람이 하고, 또 내가 못하는 일을 잘 하는 사람도 있고. 혼자살 때의 살림에 비해서 나의 몫은 1/n. 직장인이 살기에 더욱 좋다. 하루에 조금씩, 일주일에 조금씩, 한달에 조금씩, 각자가 신경을 쓰면, 우리의 살림은 실로 어마어마해지는 것이다. 맑스도 그러지 않았던가. 협업에서 추가적으로 생산되는 공통의 가치가 있다고.
<옥상에서 난 열무틱 알타리로 김치를 담그는 덕산>
<날씨 좋은 어느 주말, 부엌 옆 선반을 깔끔하게 정리한 레옹, 병우, 달군>
<설거지하다가 싱크대 청소까지 해버린 달군>
<놀라운 솜씨로 옥상에 차양막과 평상을 만든 양군>
<화창한 날씨를 틈타 일주일이 넘도록 이불을 빨아댄 승욱, 아규, 그리고 세탁기>
<누굴까? 깔끔하게 정리되고 빛나는 마루>
화장실, 손님방, 밥, 장보기, 반찬, 옥상텃밭 등 여기 담지 못한 수많은 살림들, 또 지금도 누군가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살림들, 함께 살기에 좋은 것을 이런 것이 아닐까. 살림을 나누고 키우는 것. 우리가 주거할 수 있는 공통의 장소를 함께 만드는 것.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시대가 우리로부터 앗아갔기에 실험이 되어버린, 빈집의 삶─살림의 모습들이다.
_moya
살림에 대해 인터뷰한게 새삼 부끄러워지네. 인터뷰내용 없었던 걸로 하면 안되나요? -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