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의 내용은 한국여성민우회성폭력상담소에서 2012년 주최한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에서 발제된 전희경 한국여성민우회정책위원의 글<공동체성폭력이후’,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다>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 입니다.

(특히 같이 읽고 싶은 부분에 굵음 표시를 해뒀습니다)


1. 왜 공동체 성폭력 사건에 주목 하는가.

-공동체 성폭력 사건에 있어 중요한 특징중 하나는 사건도 해결과 정도 조직문화와 직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 친밀성을 나누는 언어와 행동, 허용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 사이의 경계, 사람에 대한 평가와 인정의 기준, 조직체계의 구조와 일상적 놀이문화, 시간과 공간을 운영하는 방식 등등-이 모든 것이 조직문화를 구성하며, 이 모든 것 안에 젠더권력이 스며 들어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유념해야 할 부분은 성폭력 사건의 해결 과정을 피해자 대 가해자피해자 요구안 대 조직의 수용여부로 볼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연루된 의미투쟁의 과정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지점이다.

-특히 공동체 성폭력에서 성폭력은 사건이기 이전에 조직의 남성 중심적 문화의 누적이다. 어떤 면에서 공동체 성폭력 사건은 조직문화가 허용해 왔던 어떤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하다. 따라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그러한 사건을 낳은 조직문화에 대한 성찰과 변화의 요청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2. 성폭력 사건해결의 원칙들에 대하여

(1)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란 무엇인가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란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 피해자에게 마음을 다해 사과하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러한 행동을 저지르게 된 과정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책임있게 주시하고 규제하고 독려하고, 피해자가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공간과 문화가 되도록 조직문화를 변화시켜나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 성폭력적 문화의 변화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실제 공동체 성폭력 사건들을 보면 절차가 끝나는 것을 해결로 보는 입장과 피해자의 요구안이 전적으로 관찰되는 것을 해결로 보는 입장의 양극단 사이에서 강한 가해자 징계사건해결과 등치되어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절차 이후의 변화에 대해 무력해지고 만다

-비어 있는 것은 절차의 종결과 사건의 해결사이, 사건의 해결과 사회적 변화사이-사이들을 잇는 논의, 담론, 자리, 모임, 구상, 전망이다. 이 사이를 채워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2) ‘피해자중심주의의 의미와 효과

-‘피해자중심주의는 성폭력 사건 발생시 그 조사와 해결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의 입장과 의견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피해자중심주의라는 말은 모두가 암기하고 있지만, 막상 사건이 공론화되면 피해자의 치유를 위해 공동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별 다른 아이디어가 없는 공백 상황에 처한다. 이처럼 유일하게 이 공백상황을 메우는 것은 피해자의 요구안이 되고 피해자의 요구가 모든 해결의 구심점이 되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피해자가 말의 권위는 독점하지만, 오히려 그만큼 입지가 좁아지고 내용적이나 심리적으로 무력화되는 상태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피해자가 시작과 끝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좋은 절차가 아닐 수 있다. 피해자가 문제화하지 않고,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공동체 차원에서 충분한 고려가 이뤄져야 한다. 공동체의 실질적 변화 없이 피해자의 치유를 기대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건 해결과정을 거치면서 공동체가 어떻게 과거와 달라지고자 하는지, 그 지향이 토론되고 합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변화의 지향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중심주의는 오히려 공동체 구성원들의 수동성을 방치/조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된다. 개별사건마다 끊임없이 피해자를 향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사건처리와 관련된 정치적 부담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실제로는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마음대로 다 된다는 식의 권력화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성폭력 사건에 직면한 공동체가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논의대상을 변화의 지향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의 말이 형식적 권위가 아닌 실질적 협상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 논의는 공적이라 말해지는 조직체계와 절차 속에서의 논의와 사적이라 말해지는 인간관계 및 일상적 대화 속에서의 논의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3) ‘비밀주의 원칙정보불균형의 문제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비밀유지원칙은 피해자 보호와 2차 가해방지를 위해 주장되고 관철되어 왔다. 그러나 비밀유지의 영역과 방식이 무비판적으로 확장되면서 실제사건 해결과정에서 역효과가 발생하는 경우가 발견되고 있다. ‘피해자의 서사는 누락된 채 가해자는 적극적으로 동맹을 구축하여 가해자 버전의 사건개요를 유포한다.

-이처럼 가해자가 적극적으로 남성동맹을 구축하고 선택적 정보를 유포하는 상황에서, ‘비밀유지원칙은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목소리와 가해자의 목소리 사이의 엄청난 불균형을 초래하기 쉽다. 가해자는 얼굴, 목소리, 이야기가 있는데 정작 피해자는 누구인지, 무엇이 왜 힘든지,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들이 필요한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성폭력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피해의 회복과 공동체의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변수는 어느 정도로 피해자를 지지하는 여론, 세력, 움직임이 만들어지느냐다.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지세력이 만들어 지고 확장되기는 어렵다.

-피해자 신원보호와 비밀유지는 영원히 모두에게 비밀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비밀유지에도 다양한 수위가 있을 수 있다. 지지자들에게도 가해자의 이야기에 반박하고 비판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 성폭력 사건 해결과정이 공동체 문화에 대한 의미투쟁의 과정이라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4) 대리인은 무엇을 대리’(해야)하는가?

-‘피해자 대리인은 모든 공동체성 폭력사건에서 무조건만들어 져야 하는 위치는 아니다

-피해자대리의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들이 대리인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호소하고, 많은 대리인들 역시 대리인역할이 초래하는 심적 갈등, 피로감, 상처, 좌절과 불안을 호소한다.

-대책위원이나 지지모임 구성원과는 달리, ‘대리인이라는 이름은 피해자와의 관계설정에 있어 더욱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떠 안는다. 이로 인해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적절한 조언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 거리 설정이 좀 더 어려울 수 있다.

-대리인이 사건 해결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피해자가 논의의 장에서 한발 비껴 서있게 되거나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타이밍을 놓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대리인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점검과 확인, 섬세한 한계설정들과 합의가 필요하다.

-대리인은 피해자의 문제제기가 갖는 공익적 성격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 피해자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매순간에 함께하는 가장 긴밀한 의논자, 피해자가 격리되거나 무력화 되지 않도록 돕는 가장 유연한 조력자, 피해자가 사람들과 의미 있게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적극적인 창구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피해자 보호와 피해자 주체화는 상치되는 가치가 아니다. 한편으로 피해자 보호는 피해자에게 아무 말도, 어떤 질문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피해자 주체화는 피해자가 뭐든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공동체가 무엇을 격려 해왔고 지지하고 있으며, 누가 존중과 경청의 태도로 피해자와 관계하는가에 따라 피해자의 위치는 달라진다. ‘대리인은 그 변화를 추동하며 유연하게 자신의 활동범위를 조정해 나가야 하겠다.

(5) 관행화된 피해자 요구안에 대한 관점

-성폭력 사건의 해결 과정에 있어 매뉴얼처럼 또는 관행처럼 제시되는 피해자요구안의 전형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실명 공개 혹은 공개 사과, 제명/활동정지등의 조직적 징계, 가해자 교육 프로그램이수 또는 사회봉사 명령 등.

-하지만 피해자중심주의의 원래 의미가 왜곡되거나 추상적으로 암기 되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요구안은 논쟁과 고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제시된 요구안에 대한 의문은 공동체 내에서 공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거나 뒷담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지지자나 대리인, 그리고 피해자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새로운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피해자의 요구는 요구안의 제시로 확정 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요구 그 자체가 상황 속에서 구성되며, 또 변화한다는 점이 환기되어야한다. 요구안의 상황 의존성을 기억하지 않고, 공동체의 변화 여부와 분위기에 따라 요구안이 재조정 될 수 있다는 변화 가능성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왜 그러한 요구를 하게 되었는지 이해시키고 실질적인 공동체 변화를 이뤄내는 것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같은 유형의 성폭력 피해라 해도 피해자마다 필요가 다를 수 있으며, 그가 놓인 상황, 그가 갖고 있는 자원과 한계에 따라 그 필요를 공적인 요구안으로 만들어 내는 방식과 우선 순위가 달라질 수 있다.

-관건은 피해자 요구안에 대한 절차적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요구안이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제기가 될 수있도록 공동체가 피해자 요구안의 수용과정에서 어떤 노력과 숙고의 과정을 거치느냐다.

-구체적으로 이는 사건에 대한 공동체의 평가와 기억공유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 졌는지,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실질적 복권이 이루어 졌는지, 조직 내 다양한 목소리가 효과적으로 설득 혹은 억제되었는지 여부 등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6) 2차 가해, 침묵, 자기 규정의 문제

-‘2차가해란 성폭력 가해자에게 동조하는 발언이나 행위,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강압, 피해자의 동의 없는 사건누설 등을 통해 피해자가 추가적인 피해를 입게된 경우를 말한다.

-2차 가해는 무엇보다 성폭력적 문화’, 피해자 비난이 작동하는 메커니즘, 즉 공동체의 남성 중심적 질서와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요청되었다. 추상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공동체의 가해자 중심 문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2가해라는 명명이었으며 나아가 2가해자의 지목과 처벌이었다.

-문제는 최근 몇 년간 ‘2차 가해를 하지 않기 위해라는 문구가 조직의 수동성과 구성원들의 침묵을 정당화 해주는 매우 효과적인 핑계거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사건에 대해 폭력적/문제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말 할 때 누구로서말하는가이다. 사건의 외부자로서, 구경꾼으로서, 논평꾼으로서, 중립적이고 싶은 자기욕망에 충실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성폭력 사건에 직면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말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2차가해라는 개념이 사건에 대한 침묵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폭력을 개인화 하지 않고 공동체의 공적 문제로 다룰 수 있는 출발점이다.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지 않기 위한 방법이 해당 공동체의 상황에 특성에 맞게 모색되어야 한다.


3.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몇 가지 제언

-책임 있는 절차 만들기: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공동체의 대응은 공동체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한 책임의 영역이다. 피해자 요구안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거나 실행하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들을 침묵시키지 않으면서 공동의 논의에 참여 시키는 것은 사건을 통해 공동체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재위치화: 사건 해결과정과 그 이후는 피해자의 명예가 회복되는 과정으로 자리 매김 되어야 한다. 성폭력 피해를 말한다는 것은 하나의 공익적 문제제기로서 존중 되어야 하며,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피해자의 싸움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명예회복을 위한 싸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폭력이 무엇을 훼손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만 피해자의 치유와 공동체의 회복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해자의 탈권력화: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는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가해자의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을 사건해결의 실패로서 정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가해자의 중요성을 낮춰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피해자는 직간접적으로 지속적인 용서의 압박을 받기 쉽다. 그러나 용서란 피해자가 다시/계속 살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며 그 시점 또한 타인이 강요/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건 해결과정에 매듭 만들기: ‘은 그 누구보다도 피해자에게 가장 필요하다.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자신의 몸, 관계, 삶에 대한 일시적인 통제력 상실의 경험이라면 피해의 치유는 그러한 통제력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의 분위기, 구성원들 몇 명의 권력, 가해자의 징계수용여부에 의해 이러한 과정이 전적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하려면, 성폭력사건의 해결과정의 종료여부와 시점에 대해 피해자가 최소한의 통제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성별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의 다각화: 성폭력 말고도 문제는 많다. 여성들이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을 성폭력이라는 하나의 단어로만 설명하려 할 때, 그것은 결국 그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들거나, 혹은 피해자를 변화하고, 해석하는 주체가 될 수 없도록 만들 위험이 크다. 공동체 사건 해결의 목표는 성별권력에 기대어 일어나는 일상적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의 맥락성을 이해해가는 과정 속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이는 또한 전체적인 성별불평등에 대해 소통하고 협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구성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 만들기: 성폭력사건을 통해 자신이 속한 조직이 기대했던 그 공동체가 아님이 드러났을 때, ‘우리라는 커뮤니티를 성립하고 복원 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유된 기억이다. 절차 종료 이후, 아무도 사건에 대해 얘기 할 수 없다면 사건해결 이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긴 거의 불가능하다. 사건해결 절차 종료 후에 공적기록으로 남겨두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미 공유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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