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모모입니다^^ 공부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고 싶다는 걀팍한 욕심!!에 지난주 수요일 11시에 진행했던 <코뮨주의 선언> 4장 요약본을 올려보아요.ㅎㅎ 혹시 월요일, 수요일 11시에 시간되시는 분들은 공부집에서 같이 세미나해요. 글 긴건 싫으니까 이정도.. 

 

책.

코뮨주의 선언

작가
고병권, 진은영|이진경|박정수|정정훈|최진석
출판
교양인
발매
200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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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4장은, 우리는 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가? 그리고 왜 공동체는 항상 실패하는가.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

무엇이 우리를 코뮨주의로 사유하게 하는가? 신자유주의의 경쟁과 적대는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힘겨움을 전하고, 공동체로 넘어가야 함을 감지하게 한다. 그 공동체에는 목숨을 걸고 전체를 위하여 죽음으로 달려라 주문하던 ‘하이데거의 민족적 공동체론’과 생산수단과 삶을 공유하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공동체의 양 극단이다. 어느 경우든 개인을 거대한 공동체에 통합하고 흡수하는 “감옥과도 같은 공동체”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공동체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폭력에서 쉽게 버릴 수 없는 꿈, 제거할 수 없는 희망이다.

그 딜레마에서 블랑쇼는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를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를 제안한다.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과도,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과도 관계 없이, 혹은 헛되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속에서. 공동체는 특이 존재들의 작품도 아니고, 그들 공동체의 작품도 아니다. 무위인 것이다.

링기스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를 개념화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공유한다든가 공유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실현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 -아스텍인(디언), 유목민, 게릴라, 적- 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실현된다.

이는 타자를 나의 장소나 시간 아닌 다른 장소와 시간 속에서 보는 것이고, 나의 장소나 작업에 속박되지 않은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는 또 ‘옆에서 죽어 가는 타자’를 보고 고통을 위로하려 내미는 손을 통해 타자가 죽는 시간 또는 장소로 향하게 된다.

나는 나의 소리나 관념을 버리고 타자에게 나를 드러내며,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낭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언제나 외부에-있는 누군가와 함께-현존하는 존재라고 본다. 낭시의 공동체 개념 역시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창안하려는 긍정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낭시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관한 블랑쇼의 말을 “설사 ‘무위’의 이름으로라도 공동체를 격상시키는 모든 것을 신뢰하지 말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이 역설적 정의에 다시 질문해야한다.

우리가 공동체적인 존재라면 우리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공동체적인 존재라면 공동체를 구성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가 공동체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모든 질문은 공동체나 코뮨주의를 사유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공동으로-존재’한다는 사실

둘째,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지만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는 존재라는 것.(뒤집어 말하면, 인간이란 실패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존재라는 것.)

따라서 우리는 그 반복되는 실패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생성될 새로운 차이의 성분, 그것이야말로 존재론적 공동체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특이성이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실패는 모두 ‘개체화’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개체성을 집합체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성으로 이해하는 한, 그 집합체란 그 개체성, 고유성을 잠식하고 잡아먹는 괴물로 간주된다. 다른 하나는 집합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을 단지 집합체의 유기적 일부로 통합하고 융합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자유주의가 원자론적 사유와 결부된다면 전체주의는 유기론적 사유와 결부된다. 이 모두를 가로지르며 넘어선 (아포리아를 넘어선) 공동체를 정의할 수 있을까?

이를 넘어서려면 집합체와 개체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개체란 개체화의 결과물이다. 인간도 수십 개의 기관이 모여 개체화된 것이고. 개체란 일정하게 특권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 개체화가 발생하는 모든 지점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단일한 것으로 정의한다. 요컨대 모든 개체는 분할 가능한(dividual) 요소들의 집합이라는 의미에서 항상-이미 집합체다.

이러한 개념에서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은 무의미하다. 모든 개체는 복수의 요소들로 구성된 집합체(공동체)이다. 이러한 집합체를 하나의 ‘단일한 것’으로 구별되게 해주는 성분을 특이성으로 명명하면 특이성은 들뢰즈의 수학적인 어법으로 “특이점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한다.

특이점의 분포가 달라지면, 그 분포와 결부된 성질이나 고유성이 달라진다. 한편 물리학에서 특이점은 어떤 힘이 발생하는 ‘질점’이자, 힘들의 벡터장을 형성하는 점이다. 즉, 특이점의 ‘의미’나 ‘고유성’, ‘특성’은 하나로 결정되지 않으며 다른 특이점과 맺는 관계에 따라 아주 다른 특성이나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런 특이성은 무엇보다 외부성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특이성은 ‘단일하다’는 번역어가 표상하는 것과 반대로 사실은 잠재적 집합적 배치라는 사실이다.

 

특이성과 구성

집합체를 하나의 ‘단일한’ 개체로 정의해주는 것을 특이성이라 할 때, 우리는 그 어떤 요소도, 우리가 특이성이라고 부른 특정한 결과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한에서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특이성을 구성하는 특이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집합적 활동에서 그것의 요소들이 특이성이 극대화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성과 결부된 구성 원칙.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양태의 활동은 빠름과 느림, 움직임과 정지의 속성을 지니며, 그러한 움직임은 일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통된 움직임의 속도를 가질 수 있다. 복수의 요소들이 하나의 단일한 집합적 신체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요소들이 동일한 속도는 아니라 해도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다. 우리는 시간이란 리듬의 공유와 공-조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코뮨적 공동체의 구성과 활동에는 시간적 리듬의 공-조가 필수적이다. 그러한 서로의 움직임에 리듬을 맞추려는 노력을 우리는 협-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유기적 구성체와 특이적 구성체

‘특이적 구성체’는 특이점들이 가감되는 데 따라 달라지며, 그러한 특이점의 가감에 대해, 외부성이 열려 있는 코뮨적 구성체, 그리고 참여하는 특이적 요소들의 특이성이 최대한 표현되면서 구성되는 특이성을 분유하는 코뮨적 구성체, 나아가 그러한 요소들의 공-조 내지 협-조를 통해 집합적 신체의 리듬을 유지할 뿐 규칙이나 제도로 보장되는 안정성을 추구하지 않는 코뮨적 구성체다.

반면 이렇게 구성된 코뮨조차 자신의 안정성과 동일성(정체성)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구성 요소들의 위치를, 특이점들의 분포를 하나로 고정하려고 하는 순간 다른 종류의 구성체(유기적 구성체)로 변환된다.

유기적 구성체로 변환시키지 않기 위해서, 특이적 구성체로서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구성체로서 코뮨의 특이화를 주도하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사태와 관련된다. 리더의 주도권이 ‘고유성’으로 변환시킬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도권의 요소를 권력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다시 그 중심을 복수화해야 한다. 강한 특이성을 갖는 지점들 모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와 다른 차원에서 권력을 부분화하는 방법이 있다. 선물로 권위, 혹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소유란 언제나 삶의 흐름, 능력의 흐름, 욕망의 흐름인데 이를 멈추게 하고 ‘소유에 반하는 권력’을 구성하는 것이다.

 

코뮨주의 정치

자본의 축적 법칙 자체는 자본주의로부터 추방되는 외부자들을 끊임없이, 그리고 확대된 규모로 생산한다.

거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삶을 혁명적으로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다른 종류의 삶을 구성할 것인가? 화폐의 권력과 가치 법칙의 지배에 포획된 삶, 증식의 욕망 아래 삶이 종속되고 자본의 요구 아래 자신의 욕망이 복속된 삶, 자본이 강제하는 경쟁의 강제 속에서 고립된 개인으로서 ‘자유’를 꿈꾸는 삶, 이런 종류의 삶들과 어떻게 다른 종류의 사람을 구성할 것인가?

코뮨주의는 새로운 삶을 꿈꾸는 모든 사람의 문제지만, 돈 있고 시간 있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삶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주변화된 거대한 외부에서 항시적인 위협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다.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 시대, 코뮨적 구성의 정치가 긴급한 현실적 과제로 대두되는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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