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니체강독 매주 금요일 저녁으로 옮겨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강독이라는 거 처음 해보지만 부담도 없고 좋네요. 무엇보다 니체의 텍스트가 중간중간 빵 터뜨리는 유머덩어리여서. 강독이라는 것은 읽는다는 뜻이겠지만, 함께 읽는다는 것은 동시에 듣는 것이기도 합니다. 듣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죠. 그래서 가장 수동적이긴 하지만,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그 중 무언가는 흘러나가지 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침전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게 되겠죠.
소리내어 함께 읽는 것은, 혼자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경험입니다. 혼자 읽을 때는구구절절 곱씹으며 꼼꼼히 읽을 수 있지만, 소리내어 함께 읽는 것은 물이 흐르듯이 끊김없이 읽게되더라구요. 동료가 편안히 듣고 있는 속도를 놓친다는 것은 왠지 그의 '듣고있음'을 방해하는 것만 같아서, 뭔가 책임감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읽는 속도로 듣고, 듣는 속도로 읽습니다. 강독은 스트리밍이라고나 할까요.
읽고 듣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공부라고 할 수 없을 듯 하여, 읽고 듣는 속도로 틈틈히 쓰는 것 또한 해볼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펜을 꺼내들어봅니다. 시대의 펜, 키보드!
아무튼, 니체강독 이제 <반시대적 고찰>을 끝냈고, 다음주부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작합니다. 아마도 다음주부터는 빈농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저녁에 강독을 하고, 토요일 오전에 농사를 짓는 주경야독을 시작할까 얘기 중이어요. 관심있으신 분은 디온 반장님께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참, 그렇다고 읽기만 계속 하는 것은 아니고, 중간중간에 이 얘기 저 얘기 많이해요. 각자 사는 얘기, 빈집 얘기, 니체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에 비추어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지, 등등. 아멘.
니체로부터의 서신: 반시대적 빈집
'시대'는 니체의 언어다. 그리고 벌써 나의 키워드다. 100년도 훨씬 전에 그는 시대에 반하여 시대를 고찰했지만, 그의 비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동시대인들을 위해서 '100년 뒤'라는 거울을 제시했지만, 슬프게도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 시대에 고유한 '반시대적 고찰'을 위해서─ '1000년 뒤' 정도는 되는 거울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빈집은 반시대적일 수 있을까? 최소한 그것은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빈집을 둘러싼 '빈집─커뮤니티'를 조금만 벗어나보면 우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신기하게 바라봄 당하는 존재들이 되곤한다. 어떤 이는 아나키스트 집단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젊은이들의 아지트를, 어떤 이는 시트콤같은 재미있는 삶을, 어떤 이는 가난한 이들의 자립주거를 떠올린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빈집은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주거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규칙은 소유와 재테크다. "집 평수 넓히려는 사람들 마음 속에 폭력이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그런 마음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마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규칙과 함께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반시대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아닐까. 빈집은 "집 평수 넓히려는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은 사실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고, 생활인으로서 자취(自炊, 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생활함)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더불어 살기도 하고, 빈집에서 살기도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문제는 결혼과 함께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혼과 함께 사람들은 '자기 집'을 소유하고자 하고, '자기 집'을 위해서 시대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자기 집'을 소유하는 (계획을 가지는) 것 자체가 결혼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그리고 빈집이 이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빈집은 '어른 아닌 존재'들이 잠시 스쳐가는 임시적 주거형태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 빈집의 모든 출자금에는 출자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에, 시대로의 복귀는 언제든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질문들이 떠오른다. 빈집의 고민과 비혼의 고민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다른 형태로 가족을 구성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결혼답지 않은 결혼은 무엇인가? 소유하지 않고 집을 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출자자없는 출자금은 가능한가? 빈집은 어떻게 확산가능한가? 투자를 위한 재개발로 집이 없어지는 사람들과 빈집은 어떻게 관계를 맺을것인가? 그들의 빈집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움직였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기 위한 집이 아니라 살기 위한 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소유를 내려놓으며 각자가 빈집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선빵은 무엇이 있을까? 시대를 불편하게 할, 반시대적 한 수는 무엇인가?
<반시대적 고찰>을 읽으며 함께 토론했던 얘기들을 바탕으로, 승욱 씀. (배고파서 질문 던지고 급마무리)
다음주부터 빈농집으로 자리를 옮기나요? :) -라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