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대안금융 세미나에서는... 
이진경선생님과 수유너머연구실 사람들의 글을 같이 읽었습니다. 

정민, 디디, 주노정, 민정, 파스, 지음, 정훈, 나마스떼, 오디, 좌인, 그림 11명이 참가해서 같이 밥먹고 시작했습니다. 

디디, 주노정, 정민, 지음이 발제해주셨구요. 
나마스떼의 발제는 미완이어서 다음번 대안화폐 때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정민 발제에서는.... 
- 개인의 선택과 가족 및 주변과의 관계의 문제... 
- 맑스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 맑스에 관한 얘기
- 맑스의 경제관념과 이진경선생님의 헝그리정신과의 유사성과 차이의 문제...

주노정과 디디는 발제가 겹쳤는데... 
- property = 재산, 정체성의 문제
- 공동체 소유와 코뮨주의적 소유의 차이
- 코뮨주의적 주체생산의 문제 등

지음 발제에서는
- 맑스의 문제설정과 프롤레타리아와 코뮨주의
- 반화폐이자 비화폐인 화폐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들.
- 노동없는 지불,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
- 자본의 자신의 한계로서의 자본의 문제
- 공산주의와 코뮨주의의 차이

등등에 관한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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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해방촌연구소 <대안금융세미나> 3회 발제문

고병권, <귀족적인 맑스 - 맑스의 경제관념>,<<부커진R>> 
발제 : 정민

발제를 맡은 건 아니지만 읽다보니 궁금해서 찾아본 내용 공유 ㅋㅋ  

1.
"(맑스는)가난을 증오했고 이러한 가난에 노예근성만큼이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부도덕한 굴종과 타락을 혐오"했다. 가난은 돈의 위협에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빈자들이 가난을 이유로 돈에 굴복할 때 그들은 노예가 된다."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신념. 무장봉기에 나선 친구들에게 유산의 대부분을 줘버리는 씀씀이. 멋지다. 그러나 그 신념을 혼자만 지키는 거라면 아무래도 좋겠지만, 그게 다른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는가.

2.
“1850년대 초반 5년 동안 맑스의 가족은 런던의 소호 지구에 있는, 3개의 방이 딸린 플래트식 집에 살고 있었으며, 격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맑스에게는 이미 4명의 자녀들이 딸려 있었으며, 그 뒤 2명의 어린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 가운데 오직 3명의 자식만이 소호지구에서의 생활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면서, 약방이나 빵 가게나 식료품 가게나 석탄 가게에 외상값을 갚을 돈 한 푼 없이 힘겹게 살았다.” 결국 둘째 아들(기도)과 셋째 딸(프란치스카)은 태어난 지 1년여 만에 연이어 죽었다. 특히 딸의 죽음은 마르크스 부부에게 비참함을 더해주었다. “사랑하는 그 아이가 죽은 것은 우리가 가장 궁핍했던 시기였습니다. 나는 부근에 사는 프랑스 인 망명자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을 표시하면서 나에게 2파운드를 빌려주었습니다. 그 2파운드 덕택에 우리는 관을 살 수 있었습니다.”
3명의 자녀가 가난으로 죽었다. 굶을 정도의 궁핍함이 이어졌고, 죽은 장남의 관을 짜기 위해선 살아있는 사람들의 옷을 팔아야했다고 한다. 죽어가던 대여섯살 짜리 어린애들이 가난과 자본에 대해 맑스만한 신념과 결의를 가질 수 있었을까?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3.
여기서 흔한 발상이 나온다. 그는 천재였던 만큼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했던 건 아닐까? 가족을 우연히 밟은 개미처럼 사소하게 여기는 싸이코패스였던 건 아닐까? 어느 한 부분에 뛰어나면 다른 부분에선 바보나 다름없(었으면 좋겠)다는 요즘 트렌드에 맞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마르크스는 그의 자녀들을 이상하리만큼 사랑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그의 자녀들과 함께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 매우 끔찍한 아버지였다.” 마르크스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자식들을 친구처럼 대했고, 자신의 염원을 자식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싸이코패스였던 것 같지는 않다.

4.
그렇다면 그는 뭔가. 가족들을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자신의 신념은 더 끔찍하게 사랑했던 걸까. 그가 사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마음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혁명을 위한 투쟁 속에서 모든 재산을 희생으로 제공해 왔네. 나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네. 그럴 뿐 아니라 내가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나는 같은 길을 걸을 것일세. 다만 그 경우엔 결혼은 하지 않을 작정이지.”
그러나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자살했을 것이네.” “나는 이미 온갖 종류의 불운을 경험해 왔지만, 이번(첫째 아들의 죽음)에야 비로소 진짜 불행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네. 산산이 부서진 듯한 심경에 빠져 있다네.”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마..그는, 신념과 가족 중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비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기 신념을 위해서 가족들을 희생시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죽음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굶어왔고 앞으로도 굶을지도 모를 가족들 대신 무장봉기에 나선 친구들을 위해 유산 대부분을 넘겨줬을 때, 맑스는 무슨 심경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만 그게 궁금하다.


<코뮨주의와 소유>, <<코뮨주의 선언>>

발제 : 주노정

“코뮨주의자의 이론은 사적 소유의 철폐라는 단 한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코뮨주의는 무엇인가. 코뮨주의자는 과거 공산주의자와 무엇이 다른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문제는 코뮨주의자에게 어떤 문제 의식을 촉발시키는가. 또 사적 소유의 철폐로 귀결되는 코뮨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소유’ 그 자체가 철폐될 수 없는 것이라면, 코뮨주의적 소유란 어떤 형태로 구성될 것인가. 한번 살펴보자.
 ‘자본론’을 통해 맑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대부분 코뮨주의적 소유가 아닌 현실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분석이자 비판이었다. 그래서 ‘사적소유의 철폐’라는 한 문구로 요약 될 수 있는 코뮨주의 선언은 코뮨주의적 소유에 대한 선언이 아닌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철폐’에 대한 선언으로 읽힌다. 따라서 문제는 그러한 맑스의 ‘사적소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코뮨주의적 소유의 형태를 상상해보는 일이다.
 맑스가 말하는 ‘사적 소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에 있다. 처분가능할 때, 비로소 ‘소유’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나’와 ‘내 것’이 분리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 분리 가능할 때, 타자로부터 ‘그의 것’을 박탈시켜 ‘나’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적 소유’는 맑스에게 있어 ‘소외’의 문제와 같다. ‘소외’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앞서 말한 ‘분리’나 ‘박탈’과 관련이 있다. 소외는 ‘나’와 ‘내 것’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맑스는 ‘임노동’ 또한 사적 소유와 같다고 보는데, 이것 역시 ‘생산하는’ 자본주의에 있어 핵심기능을 가지는 ‘생산’수단’의 ‘분리/박탈’과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한다는 것은 코뮨주의자에게 있어 소외를 극복하는 일이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극복하는 일이 된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질을 회복의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과거 공산주의 철학과는 달리, 코뮨주의는 사적 소유에도, 국가적 소유에도 반대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 코뮨주의자에게 소유 주체로서 회복해야할 ‘본래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대적 사유 재산이 생겨나는 과정에 개입했던 끔찍한 역사적 폭력을 기억해야한다. 프루동은 소유권을 자연권으로 간주하는 것, 개인의 노동이나 능력차를 소유의 동인으로 삼는 것의 부적절함을 지적한바 있다. 사적 소유의 정당화를 논하는 선험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소유의 ‘불가능성’을 논했다.
 소유에 대한 선험적 정당화 비판은 소유의 ‘사후성’과 관계되어있다. 말하자면 ‘소유’가 먼저가 아니라 ‘소유화’가 먼저다. 아니, 소유 자체는 없는 것이며 오직 ‘소유화’만이 존재한다. 소유는 ‘소유화’로써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원래 ‘내 것’은 없고, 나는 ‘어떤 것’을 끊임없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점유, 수용, 취득, 증여, 교환, 지배 등의 소유화를 통해 ‘내 것’을 만들 수 있을 때만 어떤 것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유는 동적이다. 내 소유를 침해하는 것들, 내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들을 끊임없이 몰아낼 수 있을 때만 나는 비로소 어떤 것을 소유한다. 타자를 ‘내 것’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소유권’을 확립하는 문제는 근대초기, 공유지에서 타자를 추방했던, ‘공유지의 사유화’를 이뤄냈던 엔클로저 운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로크에 따르면 타자의 소유물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축적할 수 있는 체제는 화폐 도입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화폐가 없었다면 인간은 신이 설정한 사적 소유의 제한, 즉 ‘부패’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는 음식재료’는 썩기 때문에 재산 축적이 어려웠던 것이다. 화폐는 이러한 재산 형성 과정에 있어 부패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타인의 사용 여지를 허락치 않는 ‘독점’의 기능 또한 제공했다. 근대 사적 소유의 본질은 이러한 ‘독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쓰고 남은 돈은 결국 소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처분 가능한 것’으로부터 행사되는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을 가진 자’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서 화폐는 후자에 대한 전자의 권력으로 나타난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사적 소유라는 죄악의 원천을 소유의 ‘사적’ 성격에서 찾았다. 그래서 ‘국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사유재산을 옹호했던 부르주아 이론가들과 다를 바 없이 ‘사유’와 ‘국유’를 대립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코뮨주의자는 묻는다. 사유와 국유는 과연 대립하는가. 역사를 보았을 때 국가 폭력 없이 사적 소유가 성립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공통적인 것’(이를테면 공유)의 영역이 ‘국유’를 통해 사유화되거나 사유화되기 좋은 조건으로 전화된 무수히 많은 사례를 목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다시 말해, 코뮨주의적 소유란 무엇인가. 전통적 코뮨주의자의 ‘소유’에 대한 사유를 들여다보자면 예컨대 프루동은 ‘소유’를 ‘재산’에만 한정하고 싶어했다. 말하자면 소유 문제를 물질적 생산에 한정해서 논의해 왔다. 물질적 생산이 아닌 다른 영역, 그러니까 ‘정체성의 생산’문제는 ‘소유’의 영역이 아닌가하고 오늘날의 코뮨주의자는 되묻는다. 그러니까 가족, 교회, 학교, 대중매체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주체(정체성) 생산 수단들의 소유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오늘날의 코뮨주의자에게 사적 소유를 극복하는 ‘코뮨주의적 소유’의 방식은 재산 소유 뿐만 아니라 정체성 소유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실은, 코뮨주의 주체가 될 철저한 무소유자인 프롤레타리아는 재산 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생산 수단으로부터도 배제되어 있다. 
 코뮨주의자는 분리되고 추방당하고 배제되어버린 현실에서 탈주하는 사람들이다. 재산도, 가족도, 민족도, 국가도 없지만 능동적으로 그것들을 버린다. 소유의 박탈이 아니라 소유로 부터 떠나는 이들이다.
 코뮨주의에서 ‘소유한다’는 것은 ‘처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든 사람이든 공통의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는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배제와 추방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구축이다. 그러니까 타자와 어떻게 코뮨이라는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한 코뮨은 타자성을 밀어낸 자리에 공동체적 동일성을 구축하는 것도 아니고, 타자성 그 자체에 자신을 개방하고, 공통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러한 관계의 작용이 곧 생산이고 소유이다.
 코뮨주의적 소유의 방식을 논했던 실례를 보자. 1970년대 호주 원주민들이 살던 땅에 대규모 광산촌을 건설하려 이들을 쫓아내려 한 일이 있었다. 결국 재판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판결문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원주민들은 “타자를 배제하는 권리가 불분명”하고, “땅을 소유했다기보다 땅에 속했던 자들이다.”
 코뮨은 ‘공공성(public)'과 구분되는 ’공통된 것(the common)'의 생산 현장이다. 코뮨주의자들은 사유와 국유 모두에 반대한다. 동일성을 주입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반대한다. 코뮨주의적 소유에는 이질적인 존재들(타자들)이 함께 한다. 이것은 결코 소유자의 수가 많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소유’의 의미 자체를 바꾸자는 물음을 가진 존재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기예’나 ‘능력’의 권리(법적 형식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다)를 가지는 자들, 이들이 코뮨주의자들이다.


<꼬뮨주의와 소유>, <<꼬뮨주의 선언>>

발제 : 디디

-꼬뮨주의자의 이론은 사적 소유의 철폐 (맑스/엥겔스). 근데 어떻게? 
-근대적 사적소유에 대한 맑스의 생각: 추방, 배제, 박탈, 분리 → 소유권의 핵심은 자유로운 '처분'에 있음. (나 와 내것. 나와 타자를 분리하는 감각으로부터만 처분은 가능해짐) → 박탈, 분리, 소외. (나의 것이 나로부터 소외됨)
-맑스. 사적소유를 임금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 생산수단의 소유 = 생산수단의 박탈. 그럼으로서 가능해지는 임금노동.  
-주체의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사적소유 철폐
→ 인간본질 회복/ 혹은 국유화로 나타났었음. 그러나 꼬뮨주의는 이또한 지양한다.

-프루동: 소유는 도둑질. 소유에 대한 선험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오직 소유화를 통해서만 소유는 가능. (소유란 무엇인가). →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으로서의 소유. (불안정성을 내포한 운동으로서의 소유.)
-소유화 (내 것으로 만들수 있는가)의 문제는 타자의 소유/지배를 배제하는 문제. →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타자배제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right of exclusion). 그 사례로서의 엔클로저. (모든 사적소유권의 행사는 엔클로저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로크: 사적소유권을 자연권으로 간주. 그 이론적 근거는 사유화의 기반으로서의 개별신체. 신체는 타자 소유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최초 소유물. 여기서 사적 소유의 근거 생긴다. (그 신체가 생산한 것들). 근데 사적 소유권이 나의 향유를 넘어 타자에 대한 권리가 되려면? 타자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은? 로크에 따르면 화폐 도입이, 이런 축적을 가능케 함. 신은 잉여를 썩게 했다. 화폐는 썩지 않는 잉여. 소비 이상의 축적. 타인이 쓸수 없게 하는 독점. 이 독점이 근대 사적 소유의 본질.
-추방당한 것들의 상징, 혹은 타자성을 지우는 동일화 장치로서의 돈. 

-로크가 말한 개별신체는, (1) 신이 준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구성된 것 (퇴니에스). 공동의 신체가 해체되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개별신체-사적 소유의 주체-자연에서 분리된 인간이 탄생.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이 자신을 개별신체로 간주할때 그는 자연을 처분하게 됨. 분리-처분-소유의 원리. (2) 개별신체는 소유의 출발이 아닌 귀결. 부자만이 자기 신체를 소유한다. 분리.처분.매도 가능한 것으로서의 가난한 신체들. (3) 사적소유 발생해서 국가의 역할 은폐. 국가는 사적소유 이후에 등장해서 사유재산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만이 사유를 가능하게 함. 많은 공통의 것이 국유를 통해 사유화/ 사유화되기 좋은 조건으로 전환됨. 반복되는 엔클로저.

-정체성은 고유한 것인가? Property: 재산, 고유성 → 고유화. (데리다). 소유를 물질적 생산에 한정해서 논할때 정체성의 생산 문제가 빠진다. 정치성의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는가? 사적 소유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은, 재산 뿐 아니라 정체성의 소유 문제도 극복하는 것. 
-프롤레타리아는 무소유자. 무산자. 재산이 없는자. 그리고 그들은 정체성의 생산수단으로부터도 배제되어있다. 꼬뮨주의자 선언에서 맑스는 '전무'의 이미지, 이 '무'를 수동(결핍, 부재)에서 능동(떠남, 버림)으로 전환시킴. 니체는 이것을 노동자 계급의 '자유로운 이민'.이라고 부름. 사적소유의 특징인 '타자의 추방'은 '타자'로 실존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탈주로. 끊임없는 '되기'로. 자기보존이 아닌 자기극복으로. 무산자이며,무명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코뮨주의의 소유. 처분의 권력이 아닌 공통의 관계 수립. 타자성에 대한 배제와 추방이 아닌,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 구축. 타자와 동료되기. 어떻게 타자와 좋은 관계 (코뮨)을 구축할 수 있을까의 문제. 꼬뮨주의적 주체는 이런 관계의 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코뮨주의적 주체 생산도, 이런 관계의 구성을 통해 이루어짐. 타자성에 자신을 개방하고 공통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 이질적인 것들이 맺는 공통관계-맑스: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사람/사물/자연이라는 모든) 이질적 것들의 공통작용으로서의 생산이자 소유. 소유의 의미 바꾸기. 관계를 구성하는 능력으로서의 권리.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발제 : 지음

26p
맑스 자신의 문제설정이란 대체 무엇인가? ...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신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세계질서를 해체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창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생산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 비-철학(프롤레타리아!)을 통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탄생시켰고 자신을 말 그대로 무산자로서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창조하는 것. ... 자본주의의 외부, 혹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 이를 맑스는 '코뮨주의'라고 불렀고, 그러한 외부를 창조하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 또한 '코뮨주의'라고 불렀다. 

84p
어느것도 화폐가 되는 한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저 화폐의 초월적 권력에서 헤어나지 않고서 상호간의 상생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이 과연 가능할까? 화폐를 선망하고 모든 것을 화폐화하고자 하는 욕망의 배치를 바꾸지 못하고서, 다양한 욕망의 형태로 펼쳐지는 자유로운 삶이 대체 과연 가능할까? 우리 스스로 화폐의 자본주의적 사용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 차라리 이렇게 질문하자. 모든 것을 화폐로 환산하고 화폐로 바꾸려는 욕망 자체가 탈주선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화폐의 사용은 불가능할까? 비축된 화폐나 상품이 타인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지는 그런 종류의 화폐는 불가능할까? 화폐의 권력 내지 화폐의 지배가 무력화되는 그런 종류의 화폐는 불가능할까? 요컨대 이미 척도이길 그친 화폐, 권력이요 신이길 중단한 화폐, 혹은 이미 소멸하기 시작한 화폐, 그래서 이미 '반反화폐'요 '비非화폐'인 그런 화폐는 불가능할까?

248p
이제 노동자나 노동하려는 자는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의 신체를 보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게 된다. 이는 취업하려는자, 자신의 능력과 신체를 생산하려는 자로 하여금 자본의 입장에서 좀더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하고, 취업자마저도 자본의 입장에서 보아 좀더 나은 노동력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게 한다. 옆에 앉아 공부하는 사람, 옆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런 능력의 우월성을 인정받기 위한 경쟁에서 좋든 싫든 싸워야 할 상대일 뿐이다. 실업자와 취업자의 대립으로 전환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이번에는 다시 노동자간의 대립으로 전환된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경쟁하는 노동자간의 적대로 이전된 것이다. 이러한 적대는 존재하는 노동자간의 적대일 뿐 아니라 취업을 두고 경쟁하는 모든 사람들,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대립과 적대로 비화된다. '나를 위한 것'과 '남을 위한 것'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이란 본성상 어차피 이기적이게 마련이야! 어디 인간뿐인가? 안 그런 생물이 어딨어! 유전자 자체가 원래 이기적이래!" 사고의 중심엔 언제나 자기가 있고, 좋고 나쁨은 언제나 그 '자기'를 기준으로 결정하며, 사람들의 관계는 언제나 이해관계의 선을 따라 진행되고,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란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족의 범위를 결코 넘지 않는 근대적 개인주의가 이와 무관한 것일ㄲ? 

270p
노동없이 생산한다면, 노동없이 지불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해야 하지 않을까? ... '가변자본'의 개념을 벗어난, 임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불가피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지불없는 가치화를 거부하는 생산자들의 '연합체', 활동가들의 '공동체'를 통해 자본에 대해 집합적으로 지불받는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에 대해서는 지불받지만 비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는 가치화에 반하는 그런 역설적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혹은 자본에 대해 스스로 자본가와 동일한 양상으로 대체하면서 그렇게 가치화된 결과를 내부에서는 비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경우 생산의 탈노동화란 노동없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뜻하는 게 아닐까? 

450p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다. 즉, 자본과 자본의 가치증식이 생산의 출발점과 종점, 동기와 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생산은 오직 자본을 위한 생산에 불과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의 생활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가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절대적 과잉으로 표시되는 그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생산의 가능성을 보고, 이윤을 궁지로 모는 생산의 경향에서 '이윤없는 생산'의 가능성을 본다. 물론 그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고, 그런 한에서 결코 '현실성'이 아니란 단서를 추가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체로는 비록 자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자본주의적 생산 안에서 이윤으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경향을, 어떤 힘을 예시豫示하는 것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이윤없는 생산, 다른 종류의 생산을 예시 예견하고 그것을 향해 자본을 밀고 가는 자본 자신의 운동법칙을 표현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자본에 의해 통제되고 이윤에 의해 지배되는 생산과는 다른 생산의 잠재적인 힘이 자본 자체에 의해 성정하지만, 그것은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변환을 통해서만, 어떤 종류의 '혁명'을 통해서만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문턱, 이윤의 문턱, 가치법칙의 문턱을 넘어서려는 거대한 꿈안에서, 자본주의라는 절망적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힘찬 희망 안에서, 그 잠재적인 힘은 어쩌면 이미 현재 안으로 닥쳐온 미래의 한 자락인지도 모른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항상-이미 도래하고 있는 시간으로서의 미래, 어디에도 없지만 항상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잠재적 세계로서의 미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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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스스로 창출하는 '외부'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대地帶를 자동적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가능성으로 주어지는 새로운 외부라고 해도, 그것이 가능성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현실이 아니며 부재하는 세계에 속할 뿐이다. 가능성을 현실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그것을 창안하고 현실화하려는 실질적인 활동이고 실천적인 시도들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내부화'하려는 세계 속에서 그것의 외부를 창안하고 창출하려는 실질적인 활동, 그러한 의지(욕망)와 능력, 활력(에너지!)이 수반될 때만 자본의 역사적 경향은 자본의 독점과 지배를 멋어나는 문턱을 넘을 수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생산의 내적인 경향은 '이윤을 위한 생산'의 문턱을 넘어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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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이후, 아니 사회주의라는 이행기까지 통과한 이후에야 오는 머나먼 미래의 시제를 갖는 사회구성체 내지 생산양식이라면, 코뮨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창안되고 창출될 수 있는 현재의 시제를 갖는 이행운동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내부성의 논리를 따라 자본주의 발전법칙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코뮨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자본의 외부를 구성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에 의해 자유롭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필연적인 만큼 오직 하나의 형태, 오직 하나의 형상을 갖는다면, 코뮨주의는 자본의 외부를 창안하는 데 이용된 조건의 차이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그리고 그러한 관계 자체를 구성하는 양상이나 활동의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 다른 형상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과학'과 대비되는 '공상'이란 부정적 관념 속에 유토피아적 요소를 몰아넣고 비난하는 것과 달리, 도래할 세계 속에 현재를 연결하는 상상의 능력, 창안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것의 긍정적인 힘을 주목한다.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과 꿈이 없이 어떻게 도래할 세계를, 지배적인 현재에서 벗어난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 
'과학'은 그런 꿈과 몽상의 재료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꿈꾸게 하진 못한다. 꿈꾸지 못하는 자에게 그런 재료란 무력한 위안 아니면 절망의 이유를 제공할 뿐이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노동의 훈육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일과 함께 하는 삶의 꿈, 사람들의 활동이 소유의 말뚝에 막혀 멈추고 갇히지 않는 그런 세계의 꿈, 나와 타인, 아니 나와 다른 모든 것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 세계의 꿈, 사물과 사람의 흐름이 서로 어울리는 상생적 세계의 꿈, 아마도 그러한 꿈들이 서로 만나고 증식되면 거대한 횡단선을 타고 흐를 때 '과학'은 그 꿈과 현실을 연결하는 강력한 끈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