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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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자신의 문제설정이란 대체 무엇인가? ...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신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세계질서를 해체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창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생산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 비-철학(프롤레타리아!)을 통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탄생시켰고 자신을 말 그대로 무산자로서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창조하는 것. ... 자본주의의 외부, 혹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 이를 맑스는 '코뮨주의'라고 불렀고, 그러한 외부를 창조하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 또한 '코뮨주의'라고 불렀다. 


84p

어느것도 화폐가 되는 한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저 화폐의 초월적 권력에서 헤어나지 않고서 상호간의 상생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이 과연 가능할까? 화폐를 선망하고 모든 것을 화폐화하고자 하는 욕망의 배치를 바꾸지 못하고서, 다양한 욕망의 형태로 펼쳐지는 자유로운 삶이 대체 과연 가능할까? 우리 스스로 화폐의 자본주의적 사용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 차라리 이렇게 질문하자. 모든 것을 화폐로 환산하고 화폐로 바꾸려는 욕망 자체가 탈주선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화폐의 사용은 불가능할까? 비축된 화폐나 상품이 타인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지는 그런 종류의 화폐는 불가능할까? 화폐의 권력 내지 화폐의 지배가 무력화되는 그런 종류의 화폐는 불가능할까? 요컨대 이미 척도이길 그친 화폐, 권력이요 신이길 중단한 화폐, 혹은 이미 소멸하기 시작한 화폐, 그래서 이미 '반反화폐'요 '비非화폐'인 그런 화폐는 불가능할까?


248p

이제 노동자나 노동하려는 자는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의 신체를 보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게 된다. 이는 취업하려는자, 자신의 능력과 신체를 생산하려는 자로 하여금 자본의 입장에서 좀더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하고, 취업자마저도 자본의 입장에서 보아 좀더 나은 노동력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게 한다. 옆에 앉아 공부하는 사람, 옆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런 능력의 우월성을 인정받기 위한 경쟁에서 좋든 싫든 싸워야 할 상대일 뿐이다. 실업자와 취업자의 대립으로 전환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이번에는 다시 노동자간의 대립으로 전환된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경쟁하는 노동자간의 적대로 이전된 것이다. 이러한 적대는 존재하는 노동자간의 적대일 뿐 아니라 취업을 두고 경쟁하는 모든 사람들,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대립과 적대로 비화된다. '나를 위한 것'과 '남을 위한 것'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이란 본성상 어차피 이기적이게 마련이야! 어디 인간뿐인가? 안 그런 생물이 어딨어! 유전자 자체가 원래 이기적이래!" 사고의 중심엔 언제나 자기가 있고, 좋고 나쁨은 언제나 그 '자기'를 기준으로 결정하며, 사람들의 관계는 언제나 이해관계의 선을 따라 진행되고,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란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족의 범위를 결코 넘지 않는 근대적 개인주의가 이와 무관한 것일ㄲ? 


270p

노동없이 생산한다면, 노동없이 지불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해야 하지 않을까? ... '가변자본'의 개념을 벗어난, 임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불가피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지불없는 가치화를 거부하는 생산자들의 '연합체', 활동가들의 '공동체'를 통해 자본에 대해 집합적으로 지불받는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에 대해서는 지불받지만 비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는 가치화에 반하는 그런 역설적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혹은 자본에 대해 스스로 자본가와 동일한 양상으로 대체하면서 그렇게 가치화된 결과를 내부에서는 비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경우 생산의 탈노동화란 노동없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뜻하는 게 아닐까? 


450p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다. 즉, 자본과 자본의 가치증식이 생산의 출발점과 종점, 동기와 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생산은 오직 자본을 위한 생산에 불과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의 생활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가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절대적 과잉으로 표시되는 그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생산의 가능성을 보고, 이윤을 궁지로 모는 생산의 경향에서 '이윤없는 생산'의 가능성을 본다. 물론 그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고, 그런 한에서 결코 '현실성'이 아니란 단서를 추가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체로는 비록 자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자본주의적 생산 안에서 이윤으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경향을, 어떤 힘을 예시豫示하는 것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이윤없는 생산, 다른 종류의 생산을 예시 예견하고 그것을 향해 자본을 밀고 가는 자본 자신의 운동법칙을 표현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자본에 의해 통제되고 이윤에 의해 지배되는 생산과는 다른 생산의 잠재적인 힘이 자본 자체에 의해 성정하지만, 그것은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변환을 통해서만, 어떤 종류의 '혁명'을 통해서만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문턱, 이윤의 문턱, 가치법칙의 문턱을 넘어서려는 거대한 꿈안에서, 자본주의라는 절망적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힘찬 희망 안에서, 그 잠재적인 힘은 어쩌면 이미 현재 안으로 닥쳐온 미래의 한 자락인지도 모른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항상-이미 도래하고 있는 시간으로서의 미래, 어디에도 없지만 항상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잠재적 세계로서의 미래 말이다. 


463p

자본이 스스로 창출하는 '외부'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대地帶를 자동적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가능성으로 주어지는 새로운 외부라고 해도, 그것이 가능성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현실이 아니며 부재하는 세계에 속할 뿐이다. 가능성을 현실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그것을 창안하고 현실화하려는 실질적인 활동이고 실천적인 시도들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내부화'하려는 세계 속에서 그것의 외부를 창안하고 창출하려는 실질적인 활동, 그러한 의지(욕망)와 능력, 활력(에너지!)이 수반될 때만 자본의 역사적 경향은 자본의 독점과 지배를 멋어나는 문턱을 넘을 수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생산의 내적인 경향은 '이윤을 위한 생산'의 문턱을 넘어선다. ... 


466p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이후, 아니 사회주의라는 이행기까지 통과한 이후에야 오는 머나먼 미래의 시제를 갖는 사회구성체 내지 생산양식이라면, 코뮨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창안되고 창출될 수 있는 현재의 시제를 갖는 이행운동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내부성의 논리를 따라 자본주의 발전법칙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코뮨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자본의 외부를 구성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에 의해 자유롭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필연적인 만큼 오직 하나의 형태, 오직 하나의 형상을 갖는다면, 코뮨주의는 자본의 외부를 창안하는 데 이용된 조건의 차이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그리고 그러한 관계 자체를 구성하는 양상이나 활동의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 다른 형상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과학'과 대비되는 '공상'이란 부정적 관념 속에 유토피아적 요소를 몰아넣고 비난하는 것과 달리, 도래할 세계 속에 현재를 연결하는 상상의 능력, 창안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것의 긍정적인 힘을 주목한다.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과 꿈이 없이 어떻게 도래할 세계를, 지배적인 현재에서 벗어난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 

'과학'은 그런 꿈과 몽상의 재료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꿈꾸게 하진 못한다. 꿈꾸지 못하는 자에게 그런 재료란 무력한 위안 아니면 절망의 이유를 제공할 뿐이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노동의 훈육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일과 함께 하는 삶의 꿈, 사람들의 활동이 소유의 말뚝에 막혀 멈추고 갇히지 않는 그런 세계의 꿈, 나와 타인, 아니 나와 다른 모든 것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 세계의 꿈, 사물과 사람의 흐름이 서로 어울리는 상생적 세계의 꿈, 아마도 그러한 꿈들이 서로 만나고 증식되면 거대한 횡단선을 타고 흐를 때 '과학'은 그 꿈과 현실을 연결하는 강력한 끈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