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느끼는거지만,
비슷해보이는 논의들을 반복하며, 그 와중에 빈집은 빈집으로 만들어져 온 것 같아요.
규칙과 공동체에 대한 예전 토론과, 그 토론을 바탕으로 쓰인 글들을 올려봅니당. (디디)
[빈마을 공동체에 대한 단상]
- 빈집
우리는 공동체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동체라면 어떤 공동체인가?
등의 질문들을 나눈 어제의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0. 공동체
내가 빈마을을 떠나 있어도, 머릿속엔 빈마을이 있다. 그냥 내가 사는 집, 혹은 월세내는 집, 얹혀 사는 집이 아니라 어떤 공통의 감각을 갖고 활동을 하는 한 영역이 있는 것으로 느낀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빈집은 '빈집'이다. 공동체라고 해서 변산공동체나 어디 다른 '공동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곳들만 지칭하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모여 살고 있는 이 형태, 거창할 건 없어도 하나의 공동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 "여기가 하숙집이냐?"라는 말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회피해야 할 어떤 상황에 대한 묘사로 여겨지고 웃음거리가 된다.
우리는 하숙생처럼 잠만 자고 밥만 먹고 왔다 가듯 공간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다.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이상한 죄책감을 갖는다. 주인도, 손님도 아닌 '편리한' 방식으로 공간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은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0. 어떤 공동체
빈집, 빈마을에 대해 가장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은
공동체다, 그리고 게스츠하우스다 하는 것이다.
'고스트하우스'라는 새로 만든 단어의 풀이처럼,
게스트와 호스트가 섞여 사는 곳이며, 그들의 정체성들이 뒤섞이는 곳이다. (어제 승욱이 길게 말했는데, 기억이 이정도로밖에 안난다. 승욱, 올려줘--ㅎ)
네 채의 빈집 그리고 좋은 이웃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이 하나의 장은
어떤 점에서 반자본주의, 반가부장제, 생태주의, 아나키적 실천들을 부분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같이 살고자 하는 자이다. 좀 다른 방식으로. 이웃과 이방인들과 함께. 스스로를 '객'이라 부르면서.
우리는 함께 산다.
우리는 낯선 이들과 함께 산다.
낯선이를 유독 두려워하여 밤낮없이 크게 짖는 개와도 산다.
발이 차에 짓눌려 절뚝이는 길냥이도 같이 와 산다.
돈없는 자, 이주민들, 술주정뱅이, 꿈이 많은 자, 잠시 쉬었다 가고픈 자들에게
우리의 안방을 공유하고 식구가 된다.
이방인들의 흔적이 교차하는 곳. 우발적인 사건 사고들, 이야기들, 인연들이 만들어지는 곳.
빈집은 1년여 만에 그 수를 4채로 불렸다. 그 안에는
2-30마리의 성별, 국적, 세대, 가치관, 종이 다른 생물체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누가 아래 묘사한 대로 거대 괴물 덩어리이라 해도 될 것이다.
0. 장투: 장기투숙객? 장기투쟁단?
오래 마을에 묵으면서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을 우리는
장기투숙객이라 불렀다. 줄여서 '장투'.
그러나 이는 장기투쟁사업단의 줄임말 같기도 하다.
손님이면서 주인이고 주인이면서 손님인 자로서 살기.
그것을 내 삶의, 내 공간의 일부로 받아들임을 당연하게 느끼기.
언제나 손님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주기.
이런 것들은 장투를 일종의 긴장 속에 둔다.
우리의 공간이 우리 자신에게 몸과 마음을 편히 둘 집이기 바라면서,
동시에 낯선 자들을 환대하고 사건들을 구성하는 집이 되기 바라는 꿈을 꾸는 덕분에
장기투숙객은 장기투쟁단이 되기도 한다.
무엇을 위한 투쟁?
살아가기 위한,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투쟁.
0. 우리에게 규칙이 필요한가?
살림을 위한 수많은 규칙들이 있고, 오며 가며 던지는 작은 제안들이 있고, 그걸 조율하는 눈짓과 머뭇거림이 있고, 티격태격 말다툼이 있고, 신경전이 있고, 험담이 있고, 표현하지 않은 고마운 마음들, 자신을 바꾸려는 발버둥, 용트림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삶의 규칙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뭔가 많이 삐걱이고 정체되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걸 이제 넘어서야 할 것 같다. 더 살아야 하고, 더 잘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액션들이 많다. 구체적으로, 게스트를 위한 매뉴얼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있다. 빈마을 이야기를 차곡차곡 모아보자는 이야기도 있다. 마을 이장을 뽑아 집 사이의 순환이 잘 되도록하자는 제안이 있다. 빈가게를 열어 마을회관처럼 쓰자는 제안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더 늘여가자. 마을을 만들자.
(급히 어딜 또 가야하는 바람에 글은 여기까지. 재밌게 안 써지네. 흙. 마음이 급해. 다른 분들이 좀 손을 봐주십쇼.)
내가 그 부분 감명깊게 들어서 조금 기억이 나는데, guest이지만 소비적인 손님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host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 그러니까 guest인 동시에 host. 누구도 고정된 역할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그런 활동을 구성한다면, 보이지 않는 host가 곳곳에 숨어있게 되는 셈, 또한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우리들은?) 일종의 유령ghost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는. 그러니까 빈집이 ghost house였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
게스트와 호스트가 뒤섞이고 넘나들고, 호스트가 어떤 실체인 것이 아니라 고스트처럼 붕붕 떠다니는..
[김기덕의 영화 <빈집>]
'빈집'이라는 이름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김기덕의 이름을 떠올릴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아무 상관 없다'고 강조하며 얘기하곤 했다.
김기덕의 영화는 처음 한 두 작품을 보고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빈집>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찾아보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빈집>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아랫글 덕분이다.
지난주에 액션팀 회의에서 '빈집 정의하기'를 하면서 얘기나왔던
Ghost house 얘기 와도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서 퍼 온다.
보고 난 소감은... 아주 좋다.
김기덕 영화를 저어하는 사람들이라도 봐도 무방하다.
씨네마빈 상영회 때 꼭 한 번 같이 봤으면 좋겠다.
빈집살이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 준다.
주인보다 더 주인같은 손님.
집을 자신이 살기 전보다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손님.
먼저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예를 다하는 손님.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인과 도둑과 손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가사노동은 유령의 노동-누군가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저절로 되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이 아닌가?
가지지 못한 자들의 환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유령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등등
로쟈의 글이 훌륭해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꼭 한 번씩 전문을 다 읽었으면 좋겠다.
아래 인용문은 내가 특히 맘에 든 부분들.
김기덕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도둑’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빈집에서 시켜볼 수 있는 게 빨래밖에는 없었다고.
한국사회에서 집이란 건 가족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배타적인 공간이다(우리집/너네집). 그런 자기만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국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희생하며 간혹 목숨까지도 건다(한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집이고 집값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한 집을 ‘행복한 집’(스위트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란 주로 외부자/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비하는 것과 인테리어(interior)하는 것이다(집을 아예 ‘탑’으로 만들기도 하고 ‘궁전’으로 만들기도 한다. 타워 팰리스). 거기서 외부성의 배제는 행복의 조건으로 전제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폐쇄된 공간의 주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아마도 그들의 행복은 집 없는 ‘남의 불행’과의 대비 속에서만 얻어질 듯하다). 태석과 선화, 2인조 빈집살이 팀이 전전하는 집 대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빈집들은 행복이 비어있다는 의미에서도 ‘빈집’들이다.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레비나스-데리다의 윤리적 요청이기도 한데, <빈집>은 그러한 ‘환대의 윤리학’, 혹은 윤리적 요청이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집이 순수한 소비의 장이 된 이상,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도둑'이 아닌 행위를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행위가 소비다. 그건 '주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합법적으로 돈을 지불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지불하지 않는 소비는 도둑이거나 착취일 뿐이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온갖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치는 것, 그리고 빨래를 그것도 손으로 하는 것이 비주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재생산(소비가 아닌) 행위다. 사실 더 중요하게는 청소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태석이 들어가는 빈집들은 모두 대체로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한 듯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특별히 청소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과연 현실의 얼마나 많은 집들이 그러할까? 사실 집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 아무도 오지 않고 또 올 수 없는 집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집을 지저분하게 망가뜨려도 집이 비어진 채로 방치되어도 무방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한 빈민 아파트에 들렀다가 태석과 선화는 (나중에 밝혀진바) 폐암으로 숨진 독거 노인을 발견하고는 염을 해서 매장해준다. 하지만, 뒤늦게 들이닥친 아들 가족에 의해 빈집살이가 발각된 두 사람은 경찰에 넘겨진다. 태석에게 ‘납치된’ 걸로 간주된 선화는 남편에게 보내지고 태석은 무단침입 등의 죄목으로 수감된다. 거기부터가 영화의 후반부인데, 이 후반부에서 주제화되는 것은 ‘유령의 존재론’이며, 이에 의해서 전반부의 환대의 윤리학은 보충되고, 이 영화의 힘은 배가된다.
이미 남의 빈집살이를 통해서 유령 같은 생활을 해왔지만, 태석은 감금된 독방에서 더욱 완벽한 유령-되기를 연마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수행이 비변증법적인 ‘공부’인 반면에, <빈집>의 수행은 변증법적인 ‘학습’인 것('공부'와 '학습'의 차이는 다른 통신문에서 다루었다). 태석의 수행이 변증법적인 것은 간수한테 걸릴 때마다 매번 맞아가면서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석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며(시험해보면서/맞아가면서) 유령-되기를 터득해간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감금된 태석은 사회로부터 보여서는 안 되는, 즉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감옥 안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간수에게 반드시) 보여야 하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규정’ 자체가 이미 태석의 유령성을 강요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그는 사회에서 안 보이면서 보이는 존재여야 하며,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유령이기 이전에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미 유령인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둘은 등가이다. 즉, 사회적인 유령은 존재론적인 유령이기도 하다.
선화가 남편과의 관계를 버틸 수 있는 건 태석이라는 ‘유령’을 매개로 해서이다. 그것이 함축하는바, 유령을 집안에 들여놓을 때, 유령적 존재로서의 외부자/침입자를 환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그나마 견딜 만한 것이 되고 행복한 것이 된다.
<빈집>이 윤리-철학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러한 바탕에서이다(<빈집>은 “당신의 집도 혹 빈집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불손한’ 영화이다).
유령으로서의 태석은 꿈(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다. 그러니까 ‘꿈’과 ‘현실’이라는 이항적 규정을 넘어서는 제3항이다. 이 제3항을 사회학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견인해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 있다(환대의 윤리와 유령의 존재론을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빈집>은 데리다 철학의 탁월한 영화적 번안이기도 하다.
태석의 유령되기는 모호한 점이 있기는 하다.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주인공 태석은 왜 빈집살이를 하는가? 선화는 왜 유랑하기와 유령되기를 계속하지 않고, 단지 유령과 함께 사는 것(그것은 끔찍한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에 머무는가? 감옥 안에서 태석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유령성을 강요받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감옥 밖에서의 태석은 어떠한가? 그들의 유랑과 빈집살이는 계속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