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목요일 7시에 

석중, 오디, 우더, 시금치, 나루, 지음, 지호가 모여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1장 발제는 시금치

2장 발제는 석중

3장 발제는 나루가 해주었습니다.


다음 세미나는 2월 11일 화요일 7시 

4,5,6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자유롭게 참가하시면 됩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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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1장 전략들


좌파들은 이론을 (반자본주의) 정치활동에 봉사하는 것으로 만들었지만, 이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방식과 이미지가 오히려 좌파 정치를 위기로 몰고 갔다. 왜 좌파들은 자본주의라는 야수를 이해하려다 스스로 야수가 되어버렸나. 


대문자 자본주의 Capitalism는 사회적 재현의 언어에서 특수하고 특권적인 위치를 누린다.(Capitalism : 경제와 사회에 관한 맑스주의자의 담론들 내에서 자본주의가 재현되는 독특한 방식들을 가리킴. capitalism : “실제 존재하는 자본주의”) 미국을 기독교국가나 이성애국가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시하면서(규제적 허구. 차이를 지우거나 흐려버리는 것) 미국을 자본주의 국가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정확한 재현)라고들 한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라는 경제/사회의 묘사어의 다양한 용법들 속에서 자본주의는 헤게모니적인, 심지어 유일무이한 경제현존의 형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방식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 현장은 존재한다 해도 사회 주변부에나 머무는 것 정도로 치부된다. 이 책은 널리 퍼져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방식이 어떤 담론적 기원을 갖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재현하느냐는 반자본주의의 상상에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자본주의 헤게모니’라는 재현방식에는 비자본주의적 경제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짓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자본주의 헤게모니’는 반자본주의적 경제 상상을 무제한 증폭시키기도 하고, 제동을 걸기도 한다. 어떤 차이가 이런 상이한 결과를 초래할까? 경제 전면에 우뚝 선 이 거대한 이미지를 무효화한다면, 어떤 유령 같은 경제형식이 나타날까? 우리의 목표는 경제적으로 색다른 세계를 발굴하거나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담론적 인공물은 폭넓은 담론적 비담론적 조건들이 만들어 낸 복합적 결과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런 가공의 압축적 재현 속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양립불가능한 자본주의의 재현들 몇몇을 추적하며, 담론이 어떻게 실천되고 어떤 선입견을 만들어 내는지에 주목한다. 자본주의 지배는 여러 담론적 노력들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이다. 즉 자본주의 지배는 유기체적 사회 개념, 영웅적인 역사의 서사, 진화론적 사회발전의 시나리오, 본질주의적 남근중심적 이원적 사고 패턴의 복합적 산물이다. 

자본주의의 폐기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본주의에 대해 ‘사고하는’ 그 방식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해체하고 이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헤게모니적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이해방식, 이미지와 습관들을 폭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지배를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보지 않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이론화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동시에 우리는 경제를 좀 더 열린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자 한다. 

서론의 기능은 다양한 자본주의 담론들을 한군데로 소집하여 비판해 보고자 한다. ‘경제적 차이’ 이론의 전제조건으로서 경제적 동일성 비판(본질주의 비판)은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 현존 양측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질공간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이다. 이 책에서 포스트모던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적 여성주의의 전략은 우리에게 비판과 상상의 가능성을 선사한다. 


전략 1 : 허수아비 만들기

자본주의에 대한 묘사 사례

-산업발전 서사의 영웅, 역사를 시작하는 주체, 미래/근대성/보편성의 담지자.

(저발전, 환경파괴는 반영웅적 방식으로 작동한 것)

-사회진화의 최고봉. 근대화=자본주의 경제를 기초.

-통일적이고 동질적이며 사회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체계. 위기에 취약하지만 회복력도 가짐.

-소유권, 관리 및 금융통제가 만들어 낸 권력의 건축물. 자본주의적 착취는 지배의 결과. 

-사회적 구분체제에서 남근 혹은 ‘주인 용어’master term. 

(중심(선진국)과 주변(제3세계). 가정=자본주의적 소비와 재생산의 장소)

-외연은 유연하며 궤적은 변화무쌍하고 창의적이다. 주기적 위기를 겪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지역적 특성, 노동조합, 국가 수준의 규제에서 자유롭다. 

범지구적 (자본주의적) 경제. 경제 결정주의. 국제금융. 다국적기업.

-절대적 현존으로서의 자본. “무한복제 능력을 지닌 흡수자”.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은 경제적 차이를 이론화하고, 자본주의 헤게모니 담론을 경제적 복수성과 이질성으로 보완할 가능성에 덫을 놓는다. 이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인 반본질주의 기획(동질성이 아니라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고자 하는 기획)이다. 여성주의 및 여러 반본질주의 기획들이 정체성과 사회적 헤게모니를 재성찰하고 있음을 주목했다.


전략 2 : 자본주의/비자본주의 관계의 해체

사회적 구성인자들은 거의 항상 절합되어 있으며, ‘헤게모니적’ 관계구조의 계기들로 “봉합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절합은 항상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그 계기들이 가진 ‘의미의 잉여’에 의해 쉽게 전복된다.(예. 여성+결혼 vs. 여성+여성주의) 따라서 정체성을 역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경계가 분명하고 중심을 가지는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정체성은 열려 있고 불완전하며 다양하고 변화가능한 것이다. 정체성은 혼종적이고 유모적이다. 

경제적 총체성은 서로와의 관계가 항상 전복될 가능성을 가진 다양한 경제형식들의 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다원적 담론분석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주의가 비자본주의적 가정경제를 담론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헤게모니를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다.(가정경제 : ‘자본주의적 재생산’ vs. 비자본주의적 ‘가내 생산’) 여성주의 담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통일성과 동일성과 경제 일원주의의 기원을 문제 삼으며 경제적 차이와 다원성의 새로운 ‘헤게모니 담론을 열었다. 

비자본주의는 이질성과 차이의 다양한 영역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헤게모니 담론에 포섭되는 것으로 재현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완전한 통일체로 존재하고, 비자본주의는 불충분함이나 부재로서 존재하는 한, 경제는 복수의 공간, 차이와 투쟁의 공간일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이 자본주의적 장소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여성주의자들은 둘 중 하나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원론의 위계에서 벗어나고자 성적인 차이를 재이론화했다. ‘남성들’을 단수 즉 자기동일적이고 결정적인 존재가 아닌 복수의 특수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성들’을 긍정적이고 특수한 존재로 이해할 조건이 된다. 이를 경제형식에 적용해 보면, 자본주의를 복수의 특수성으로 파악하는 일은 비자본주의를 긍정적이고 차별화된 경제형식으로 담론화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봉건주의, 노예제, 독립적인 상품생산형식, 비시장적 가정경제관계 등은 복수적인 경제공간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이런 경제형식은 지배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존재에 필연적으로 종속되거나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본주의들과 절합되고 이를 중층결정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반본질주의적 전략을 작동시키고자 한다. 자본주의들 사이에 근본적인 동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확장성/재산소유권/권력/이윤/자본축적과 같은 자본주의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역시, 다른 경제형식이 자본주의에 적응하듯(자본주의에 의해 구성되듯) 다른 경제형식에 적응해야(그에 의해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자체를 자본주의와 다른 것으로 이론화하는 것, 즉 본질적이거나 일관된 정체성이 없는 것으로 이론화하는 것은 변화가능성을 무한 증폭시킨다. 또한 자본주의를 다원적 경제담론 속에서 재맥락화하는 작업은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뒤흔든다. 헤게모니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특성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안정화된, 항상 전복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적 절합의 특성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안적 경제담론은 자본주의의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지배를 전복시킬 투쟁의 장이 된다.


전략 3 : 반본질주의적 실천으로서의 중층결정

자본주의는 변치 않는 ‘내부’를 갖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변화하고 모순되는 ‘외부’에 의해 구성된다. 모든 자본주의적 현장과 실천은 ‘중층결정’된다. 중층결정이라는 이론적 렌즈를 통해 보면 개별 자본주의의 지점들 각각이 환원불가능한 특수성을 띤다. 대문자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차이들에게 길을 양보할 때, 비자본주의적 타자는 단수성과 종속에서 해방되어 차별화된 다중성으로 드러날 잠재력을 지닌다. 이때 이 긍정적인 존재들을 어떤 식으로 규정할 것인가? 이 책에서 우리는 다양한 계급상의 차이를 기획하는 방식을 선택했지만, 이 역시 가능한 차별화 매트릭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전략 4 : 경제적 차이 이론의 정교화

우리가 (가치형태로 존재하는 임노동과 잉여노동의 전류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다양한 경제형식 중 하나로 재현할 때, 자본주의 헤게모니는 당연시할 대상이 아니라 이론화가 필요한 대상이 된다. 이 경우, 우리는 하나같이 자본주의적이라고 간주되던 경제 현장들을 다양한 자본주의적 비자본주의적 계급과정이 상호작용하는 경제적 차이의 현장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자본주의 사고법으로 보면 금융 산업(6장)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호명방식이 다원성과 차이를 부각시키기보다 모호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금융산업이 비자본주의적 계급관계 발전에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해 온 사례들도 많다.(조합기업, 자영업자들의 장비 구입) 이제 우리가 금융산업 자체를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이론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모순적인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금융산업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활동 및 관계들의 존재 조건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다양한 계급착취와 잉여분배의 형식을 이론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개인의 경제적 경험을 차이와 가능성의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이 경우에 우리는 공동체적 혹은 집단적 전유 형식을 확립할 가능성, 자기전유의 가능성, 타인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를 줄일 가능성, 잉여 분배의 최종 목적지와 규모를 바꿀 가능성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이 경제적 ‘개선’, ‘해방’, ‘평등’의 비전과 어떻게 절합될 것인가는 숙제로 남아 있다. 이는 이론 속에서 뿐 아니라 경제혁식이라는 반가본주의 정치를 통해서도 구성되어야 한다.


전략 5 : 잔해를 딛고 기초 다지기

‘자본주의’적 대문자 동일성에 의한 재현 방식은 우리의 감정을 후끈 자극하며, 우리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적대자로 만든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와 그것을 구성하는 서사가 부재한다면, 전통적으로 반자본주의 정치와 결부되었던 그런 식의 정치 감정도 부재한다. 자본주의라는 야수를 살해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 반대자로서의 주체지위 또한 말끔히 지워버렸다.

이제 우리는 욕망 부재의 상태에서(혹은 모순된 다중적 욕망들의 현존 속에서) 비자본주의 경제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근거리에서 대면할 때 강력한 적개심을 느낀다는 점에서 이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욕망’할 수는 있지만, 그것과 함께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경제적 차이의 경관을 원하기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차이를 욕망하지는 않을 수 있다. 사회재현의 과정은 욕망하는 주체들을 요구하고 구성해 낸다. 하지만 비자본주의적 계급과정의 재현은 이러한 일을 거의 시작하지 않았다. 비자본주의적 성격의 ‘친절한 괴물들’이 살고 있는 경제를 상상하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획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피둥피둥한 몸뚱이를 여위게 하고 대신 그 ‘구성적인 외부’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이것은 ‘색다른 자본주의들’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비자본주의적 경제적 차이라는 긍정의 공간을 구성해내기 위한 조건이다. 이런 살빼기와 살찌우기의 기획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비전/기획/감정을 빚어내는 과정을 시작할 것이다.


로드맵 : 자본주의의 재현들은 정치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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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2장 : 자본주의와 반본질주의, 그 모순적 만남

발제 : 최석중, 2014-02-06


여기서의 ‘자본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잉여노동의 착취?

반본질주의를 정의하기 위해서, 본질주의란 무엇인가? 결과를 있게 하는 진정한 핵심 원인이 있다고 믿는 것?

반본질주의는 무엇인가? 본질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 핵심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게 결과라고 믿는 입장?(본질주의 반대개념으로서 비본질주의는? 반본질주의 마저도 본질주의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념이라는 면에서 비본질주의보다는 반본질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함.)

왜 하필 지금 반본질주의를 얘기하는가? 자본주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좋은 개념 도구이지만, 지금까지 존재했던 반본질주의의 한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와 반본질주의의 만남의 어떤 면이 모순적인가? 자본주의를 역사발전의 종착점으로, 사회 구성의 원리로 보는 면에서 본질주의라고 할 때, 반본질주의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개념이다. 본질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반본질주의의 주장이라고 한다면, 그 주장 자체도 그 주장의 유일한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면에서 본질주의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그래서 모순이라고 하는 것인가?


알튀세르의 유산

알튀세르의 중층결정개념? 정체성은 다양한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짐. 정체성을 명확한것이 아닌 다양한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측면에서 반본질주의에 해당됨. 

왜 갑자기 알튀세르인가? 그전의 본질주의적인 서양의 전통 및 맑스주의자들의 사고와 다른 시각의 이론으로 기여. 반본질주의 이론에 기여.

반본질주의가 왜 중요한가? 억압된 자들을 부활시키고, 부재하는 것을 위한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고 한다고 해도 그걸 원하는가?)


알튀세르와 자본조절학파

알튀세르 이론 : 사회적 총체성은 서로를 중층결정하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특수한 관계들의 조직, 혹은 절합이다.

조절론자들 : 알튀세르 이론의 영향으로, 국가의 형식과 활동, 시민사회의 제도, 이념과 문화의 영역을 자본의 지지물과는 다른 것으로 이론화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각각의 역사적 시기들의 특수성을 구체화하고 각 시기들이 어떻게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차원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분석을 수행할 수 있었다?)

리피에츠 : 발전모델은 역사적 사건의 결과일뿐, 자본주의 재생산의 기능적 필요조건은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개별 규범들과 제도들에 의해 중층결정된, 각각의 시간과 장소에서 독특한 경제형식으로 구성된 우연적 현상들로 나타난다. 

리피에츠 한계 : 그러나 자본의 축적의 논리는 변하지 않는 핵심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정말?

근거 : 발전모델은 우연성 영역을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축적과 관계없는 우연적 관계와 축적을 유지시키는 효력을 미치는 관계로 나눈다. 자본주의적 발전모델 안에서는 비자본주의적 환경 속에 있는 생산기술의 대안적 정체성이 억압되고 평가절하되며, 심지어 무의미하다고 간주된다. 불변의 논리가 본질로 작동하는 한, 자본주의는 특수한 사회적 절합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극복될 수 없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알튀세르) => 자본주의가 구성적 외부에 기대 존속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이 여타의 과정/차원보다 사회적 재생산에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여성주의 이론 역시 부차척인 위상을 벗을 수 있었다. => 여성주의는 재생산 영역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함. => 경제일원론에 도전 => 재생산 영역을 자본주의와는 다른 대안적인 경제 정체성으로 이론화. => 이중체제론 =>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존재 파악 => 자본주의는 사회적 총체성 안에서 다른 형식의 경제와 함께 상호구성적 중층결정적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 => 가능성을 완전히 열었다기 보다는 두개의 대립 구조 속에서 파악, 여성의 노동을 두드러지게 표현했지만, 종속적 처지에서 구출하는데 한계.


포스트알튀세르주의 포스트맑스주의

라클라우와 무페 : 중층결정은 모든 사회적 측면이 다른 측면들을 구성하는데 참여한다고 이해한다. 다시 말해 중층 결정 관계들의 바깥에서 구성된 요소들 사이의 상호 인과성에 의해 사회가 구성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라나 고도로 발전된 이론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라클라우와 무페의 작업에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사회발전 서사의 영웅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에 포섭된 우리도 실제는 그러하지 않음에도 생각은 그리 하고 있는게 아닐른지. 정확한 분석없이 어떤 현상이든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전복될 수 없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한계의 원인 : 라클라우와 무페는 단 하나의 폐쇄된 사회적 총체성을 해체하고 이를 경제적 토대에서 떼어내고자 했지만 이 과정에서 경제적인 것을 이론적으로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둔다. 경제적 사회적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는 현재에 깃들며, 현재는 추상적 자본주의 묘사의 구체적 체현물이 된다. 

일반적 경향 :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은 종종 경제에 대한 이론화를 기피하는데, 이는 경제 영역에서 이론의 부재를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경제를 대표하면서 모든 영역에 강력한 힘으로 침투하게 된다. 


포스트알튀세르주의 발전이론과 포스트발전이론

이전의 맑스주의자들 : 2차 대전 이후 주류 담론이나 좌파 담론 모두 경제제일주의적이고 경제일원론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만 차이가 있었다. 1970년대 좌파들은 발리바르와 알튀세르의 저작에 기초하여 경제일원론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획에서도 자본중심주의의 문제가 보인다. 결국 이들은 자본중심적으로 이론을 전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발전 서사의 중심에 두고,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고 주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최근의 맑스주의자들 : 최근 좌파이론가들은 발전을 보편적 사회 실재가 아니라 경제주의적 담론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반경제주의와 반유럽중심주의는 융통성 없는 미래상을 대체하고, 문화적 사회적 차이들을 가시화하며, 헤게모니/지역적 권력/발전과정/주체성에 저항하는데 일조한다. 그러나 기존의 발전 기획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발전이론 역시 자본중심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자체의 독특한 가치를 발견하여 인정해 주지 않으면 자체적인 정체성은 소멸하여 부속적인 위치에 머무르게 되며,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그래서 저가치적인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


풀에게는 산토끼가 누운 흔적만이 남나니(무슨 의미일까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경제주의의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정체성의 형이상학때문이 아닐까? 단어와 대상은 일대일로 존재해야 하므로,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여야 한다.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전통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뒤흔들고자 했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비껴간 것 같다. 

자본주의/남성을 다중적이거나 다양한 것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비자본주의/여성을 일군의 특수한, 중요한 존재 형식으로 이론화하기 위한 조건이다.

자본주의 텍스트를 해체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전략적 효과를 갖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독해는 잉여와 잉여의 모순적 의미마저도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독해를 통해 비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장소, 자본주의가 동일성의 논리를 벗어나기에 더 이상 자기동일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는 장소 또한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중층결정을 해체 전략을 보충하고 보완하기 위한 부가적인 반본질적인 전략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전략들을 합치면 우리는 자본주의 담론 ‘헤게모니’의 토대를 흔들고 사회적 결정에서의 자본주의의 역할을 재개념화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교묘하게 재개념화의 시험을 회피한 채, 무언가를 조직하는 계기로서, 사회이론에서 의미와 인과력의 기원으로서, 꾸준히 행세해 왔다. 이것이 단순한 이론적 누락일 리는 없다. 이는 언어와 결정이라는 개념들의 헤게모니를 재확인하는 것인 셈인데, 중층결정은 바로 이를 반박하는데 안성맞춤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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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계급과 ‘정체성’ 정치

깁슨-그레엄에 따르면, 대부분의 맑스주의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본질주의적 계급모델에 따라 개인을 부르주아지/ 프로레타리아트 계급으로 이분화하며, 각 개인은 생산관계 속에서 자신의 계급에  따라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적 분석 속에서 자본주의는 넘어설 수 없는, 자본주의의 밖이 없는 경제의 모든 것으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산업의 재구조화 속에서 노동계급은 쇠퇴하고 있으며 계급정치의 가능성은 비관적이다. 계급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과 정치적 적실성은 감소되고 있는가?
그러나, 만약 경제가 단 하나의 본질 즉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형식들에 의해 중층결정되는 영역으로 이해된다면, 정치적 계급 역시 자본주의적 관계 뿐 아니라 다른 비자본주의적 관계들을 포괄하는 방식으로(396p.)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계급은 경제의 객관적 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잉여노동을 생산하고 전유(착취)하는 사회적 과정으로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잉여노동의 분배과정’으로 정의된다.

착취를 사회적 과정으로 바라봄으로써, ‘보다 자기 의식적이고 자기 변형적인 계급 주체성을 만들어 내고 계급운동과 사회적 혁신을 지향하는 상이한 정치를 창출하는데 이러한 정치는 여러 다양한 계급 혹은 비계급적 과정과 위치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구성된 주체들 간의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동일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133p.)

계급과정을 착취적 걔급과정과 분배적 계급과정으로 구분함으로서 계급범주를 확장하고, 계급과정의 분석을 통해 일정범위의 비자본주의적 계급 대안의 존재를 주장(134p,)할 수 있다.

또한 계급과정은 사회적 삶의 다양한 측면들에 의해 증층 결정되고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잉여노동이 생산, 전유, 분배되는 모든 장소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가정, 국가, 교육기관, 자영업, 노동조합 등(139p,)

계급은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과정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과 지점들의 총체로 구성되는 계급구조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 따라서 계급변혁의 기획은 항상 가능하고, 사회적 격변과 헤게모니적 전환을 반드시 수반할 필요가 없다.  잉여노동이 생산, 전유, 분배되는 방식을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계급투쟁은 일어날 수 있다.

수와 빌의 사례: 다중적인 계급지위, 탈중심화된 계급정체성
젠더관계에 착취와 계급의 차원을 추가하는것( 재구조화된 가구: 계급을 둘러싼 투쟁의 결과), 가정이라는 장 그 자체가 하나의 자율적인 생산의 지점으로 구성, 그 안에서 다양한 계급과정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148p.)

사회를 체계적이고 헤게모니적인 것으로 재현하는 맥락에서, 국지적인 ‘저항’의 정치는 헤게모니적인 구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으로 묘사되나, 계급이 특정 사회구조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착취에 대한 개별적 투쟁의 형태로 나타는 계급정치는 언제나 존재하며, 중요한 변혁적 효과를 지니는 경험이 된다.(152p.)
전략적 연대와 동맹의 형성과정에서의 정체성 인식, 혹은 연대와 동맹의 육성 가능성??




손님

2014.02.11 22:56:27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지젝의 강의:경제]2013.09.25 "왜 하필 지젝은 강남에서 강연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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